| 한자 | 大成 中學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중국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개교 시기/일시 | 1921년 7월 11일 |
|---|---|
| 폐교 시기/일시 | 1946년 9월 16일 |
| 이전 시기/일시 | 1924년 |
| 개칭 시기/일시 | 1926년 11월 11일 |
| 성격 | 학교 |
| 설립자 | 강훈 |
1921년 7월 11일 북간도 용정에서 공교회(孔敎會)가 설립한 민족학교.
공자의 유학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아 사서오경(四書五經)·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교수 기본내용으로 하였다.
대성중학(大成中學)은 공교회(孔敎會)가 1921년 7월 11일 북간도 용정에 세운 민족학교이다. 강훈(姜勛) 등이 연길도윤 도빈(陶彬)의 지지를 받아 용정촌에 2층 벽돌목조건물로 교사(校舍)를 짓고 대성학교를 개교하였다. 강훈이 학교운영이사회 이사 겸 교주(校主), 교무주임 임봉규(林奉奎), 현기형(玄玘衡)·한장순(韓長淳)·김소연(金素然)·이정열(李貞烈) 등을 교사로 초빙하였다. 개교당시 학생수는 50명이었다.
대성중학은 공자의 유학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아 사서오경(四書五經)·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교수 기본내용으로 하였다. 공자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룻날 전체교원과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존공의식(尊孔儀式)을 거행하고 공자제를 지냈다. 대성중학의 이러한 교육이념과 교수내용은 새로운 사상 즉 공산주의 사상이 전파되고 이를 수용한 학생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한 학생들은 미신을 타파하고 공자의 유학사상을 반대하고 과학 등 새로운 교과목을 요구하였다. 학교개혁을 거부하자 학우회를 조직하여 대성중학을 인수하고 관리할 것을 선포하였다. 학우회는 임봉규를 대신하여 수학교사 현기형을 교무주임으로 추대하였다. 학우회는 교사들과 학교 운영방안과 교수내용을 협의하여 인문과학을 위주로 하고 자연과학과 외국어(영어·일어)·한자를 골고루 배정하였다. 아울러 습자·수공·도화·음악·체조 등의 과목도 증설하였다. 학우회는 교육을 종교와 분리하고 학생들은 동맹휴학 4일 만에 수업을 정상화하였다. 그러나 대성중학은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수업연한을 2년으로 줄여 1923년 3월 제1회 졸업생 47명을 배출하였다. 다음해 3월에는 제2회 졸업생 18명을 배출하였으나 극심한 흉년으로 2년 8개월간 휴교하였다.
1926년 박재하(朴載厦)가 대성중학 복교사업에 착수하여 연길(延吉)의 대동중학(大東中學)과 연합하여 11월 11일 대성중학을 복교하였다. 교장 박재하, 교무주임 현기형, 총무는 이영식이 맡았다. 같은 해 11월 23일 학교운영이사회를 구성하여 강훈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9·18사변 이후 일제는 한인 사립학교들을 통제하기 위해 1934년 3월 용정의 사립중학인 대성중학·동흥중학·농업중학 3개교를 민성중학(民成中學)으로 합병하였다. 1년 후 대성중학과 동흥중학은 다시 분교되고 농업중학은 폐교되었다.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여 대성중학 졸업생 신병권·김창준 등이 대성중학현기성을 교장으로 추대하고 10여 명의 교사를 초빙하고 6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그해 다시 복교하였다. 다음해인 1946년 대성중학은 용정의 5개 중학교와 합쳐 용정중학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