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奎巖齋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서당 |
|---|---|
| 설립자 | 김약연 |
| 개교 시기/일시 | 1901년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08년 |
| 최초 설립지 | 북간도 명동촌 |
1901년 규암김약연이 북간도 명동촌에 설립한 조선인 서당.
규암재는 규암김약연이 1901년 북간도 명동에서 세운 서당이다. 김약연은 1899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다섯 가문, 142명을 이끌고 북간도 불굴라재에 이주하여 명동촌을 일궜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한(董閑)이라는 지주에게 천 일경(日耕)의 땅을 구입하였는데, 그 땅에서 가장 먼저 학전을 떼어 내 교육 경비를 마련하였다.
이주 2년 뒤인 1901년 김약연은 규암재를 설립하여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규암재는 1908년 남씨 가문의 오룡재(五龍齋), 김하규의 소암재(素岩齋)와 폐교한 서전 서숙의 맥을 이은 명동 서숙으로 발전하였고 1910년에는 명동학교로 거듭 났다.
김약연은 규암재에서 주로 한문을 중심으로 가르쳤다. 원래 규암의 가문은 관북의 대표적 선비 집안으로 함경도에서 알아주는 가문이었다. 그는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삼판(三判), 또는 사판(四判)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맹자를 완독했다고 해서 '맹판', 예절을 잘 지킨다고 해서 '예판', 사리판단이 정확하다고 해서 '정판'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약연은 학구열이 대단하여 유교 공부에만 그치지 않고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까지 통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김약연은 규암재에서 주로 한학을 중심으로 한문과 경전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의 세계관을 넓혀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文在麟) 목사가 8세부터 규암재에서 공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