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鳳凰새 바위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작품/설화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설화|항일 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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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등장인물 | 항일군|일본군 |
| 모티프유형 | 일본군의 패배|봉황새 바위의 머리 제거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7월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6년 4월 |
| 채록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에서 일본군이 항일군의 기세를 누르고자 봉황새 바위의 머리를 제거한 것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
안도현유수천역에서 큰 길을 따라 동북쪽으로 3리쯤 가면 ‘봉황새 바위’라는 작은 바위가 있다. 1937년 음력 정월의 어느 날, 일본군은 항일군을 토벌한다고 유수천을 지났다. 일본군이 봉황새 바위로부터 5리 쯤 떨어진 떡구유흠에 접어들었다. 그때 지뢰가 터지면서 일본군은 전멸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군수 물자를 수송할 때, 호위 병력 없이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해 7월의 어느 날, 일본군은 10여 대의 마차에 무기 탄약을 싣고 유수천을 지났다. 이번에도 하늘에서 우박같이 총탄이 떨어졌다. 또다시 일본군은 항일군의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이다.
두 번이나 함정에 빠진 일본군 사령부 장교들은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한 토벌군 대장은 유수천떡구유흠에서 거듭 함정에 빠진 것은 유수천 동쪽에 있는 봉황새 바위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는 봉황새 바위의 조화로 인해 백두산 항일군이 기운을 얻는다고 보았다. 이에 일본군은 봉황새 바위에 죄명을 씌우고 그 바위를 까내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많은 한인을 부려 1940년 4월에 봉황새 바위의 머리 부분을 잘라냈다. 일본군은 봉황새 바위를 머리를 잘랐지만, 결국 항일군에 쫓겨 몇 해 후에 달아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