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농사

한자 논農事
분야 생활·민속/민속|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0년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대-1920년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3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6년 8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9년
정의

동북3성 지역 한인 사회의 수전(水田) 경작의 개척 역사와 농사 기술.

개설

한인들은 처음에는 주로 밭농사를 하다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벼 생산에 성공하면서 동북에서 처음으로 논농사를 보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인은 논농사의 개척자와 주력군의 역할을 하였다.

한인 수전 경작의 역사

1870년대 길림성의 통화에서 시작된 벼농사는 인근 지역으로 급격히 확산되어 한인이 사는 곳은 모두 수전이 있었다. 1910년대-1920년대에 와서는 거의 대부분의 동북 지역에서 벼를 재배하게 되었다. 벼 생산에서는 처음엔 산종(散種)을 하다가 후에 점차 이앙(移秧)을 실시하게 되었다.

1908년 5월에 요령성의 흥경(興京, 현 신빈)과 길림성의 통화(通化) 일대를 답사한 류건봉(劉建封)이 쓴 『백산기영(白山紀詠)』에는 “논농사는 모두 한인들이 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1928년 등강계(藤岡啓)가 집필한 『동성괄목론(東省刮目論)』에는 “만주의 논벼재배는 약 50-60년 전에 압록강 하류에서 이주하였던 한인이 통화의 상전부(上甸孚)에서 시험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이 첫 시작이었다. 한인들이 만몽(滿蒙, 만주와 몽골) 일대로 이주하여온 역사는 이 일대의 수전 개발 연혁과 동반 된다. 한인들은 실로 만주 수전 개발의 은인인 것이다. 승냥이를 몰아내고 가시 덤불을 헤치며 수전을 개발한 한인들의 공적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중국의 동북 지방에서 한인에 의해 벼의 재배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사람들의 경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다른 작물에 비해 경제성이 높은 벼농사의 성공으로 한인의 경제적 형편과 식생활이 변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한족 농민들이 한인 농민을 모집하여 벼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벼농사의 성공은 동북 지역의 경제사정을 변화시켰는데, 한인 농민은 많은 황무지를 수전(水田)으로 개간하는 일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한인의 수전과 일제의 수탈정책

1930년 동북지방의 벼 생산량은 1,300만 섬에 달했고, 이중에 91%를 한인 농민이 생산했다. 벼 재배 면적의 신속한 확대는 한인들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일본군대와 자본가들의 ‘약탈을 위한 우대정책’에도 기인하고 있다. 1913년에 봉천수리국(奉天水利局)을 설치하고, 「벼경작장려강정」까지 반포하면서 한인의 벼농사를 부추겼다. 1916년 길림성 실업청 에서는 자금 6만관을 내어 한인을 모집 한 뒤에 3년간 황무지 100쌍을 개간해서 벼농사를 짓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벼농사에 한인들이 공헌을 했지만, 만족과 한족 지주와의 분쟁도 적지 않았다. 또한 한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전으로 만들어도 대부분 지주들에게 수탈당했고, 각종 세금도 부담해야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의 약탈이 극심했다. 1936년 8월에 일본은 매년 1만호의 한인 농민을 동북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작성하여 「만선척식유한분사」를 세워 동북에서의 한인 이민 사업을 독점하였다. 1938년에는 이민구역을 동북의 39개현으로 정했다가 1939년에는 전 동북 지역을 이민 구역으로 규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많은 가난한 한인 농민들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동북으로 이주했는데, 1937년부터 1941년까지 24,468호의 103,361명에 이른다.

또한 일제는 수많은 한인 농민들을 황폐한 동북의 북만벌과 내몽골지구에 보내서 수전을 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민 계획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토지를 수시로 빼앗았다. 1941년까지 ‘동양 척식 회사’, ‘동아 권업 회사’, ‘만주 척식 회사’ 등 일제의 경제 약탈 조직은 2,026만 ha의 토지를 약탈했는데, 이것은 당시 동북지역 총 토지의 14.3%였다. 이때 일제는 말로는 토지 가격을 지불한다고 했지만, 완전히 헐값으로 보상을 했다. 그리고 총 인구의 3-4% 정도인 지주들이 경작지 총면적의 50%를 점유했다.

호조조와 집체 농업 체제

해방 후 중국 정부는 공유지와 일부의 사유지를 무상으로 농민에게 분배했다. 1946년 5월 중국 공산당은 ‘토지 문제에 관한 지기’를 내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 계획을 세우고, 1948년 8월에는 토지 개혁 운동이 끝나서 농민들이 토지를 분배받았다.

1947년에 호조합작운동(互助合作運動)이 일어나 각 지역에 호조조(互助組)가 조직되었다. 이 호조조나 초급사(初級社)는 고급 합작사 및 인민 공사 순으로 광범위 조직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다. 호조조란 몇 호의 농가가 토지나 가축 등을 각자 소유 한 채 축력이나 농구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농번기에 공동으로 노동하는 경영 형태를 말한다. 초급 농업 생산 합작사는 농민이 토지를 제공, 출자하여 집단적인 노동을 기초로 경영을 통일적으로 행하는 조직 및 경영 형태를 말한다.

이 단계까지는 토지의 사유성이 남아 있으며, 공동으로 노동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한다. 고급 농업 생산 합작사는 토지에 대한 보수는 폐지하고, 역축농구는 합작사가 사들이고 토지를 비롯한 주요 생산 수단은 합작사원의 집단 소유가 되는 단계이다. 인민 공사는 정사합일의 조직으로 공업·농업·상업·교육·군사를 하나로 결합한 단위이며, 향(鄕)에 상당하는 행정 단위이다.

호도거리와 개체 농업 체제

이러한 집체 농업의 관리 체제는 1982년 막을 내리고, 1983년 이후로 각 농가가 노동력에 따라 균일하게 분배된 경작지를 개체농업의 형태로 운영하게 되었다. 개체농업 이후 도시로 이주한 농민 중 호적은 그대로 두고 도시로 나간 농민의 경우 자신의 경작지를 인력이 남는 현지 농가와 합의하여 대신 경작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양농가 간의 생산물 분배에 있어서는 정해진 조건이나 관행은 없지만, 대부분이 이주 농민에게 일 년 먹을 식량만 주는 조건으로 대리 경작된다. 그 대신 인구 당 내는 세금은 호적을 가지고 있는 이주 농민이, 논밭 경작지 당 내는 세금은 현지 경작농민이 부담한다. 호적을 옮기게 되면 경작권은 자동으로 사라진다.

1983년에 채택된 호도 거리 제도는 집체 농업을 포기하고 각 개인이 자기 기술로 농사를 경영하는 개체 농업으로 전환하도록 한 조치다. 호구에 따라 분배된 토지의 경영과 그 수입의 사유를 원칙으로 하는 제도이다. 집체농업 때는 일을 시작할 때 종을 쳐서 알렸고, 빨리 나오라고 독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체 농업에서는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농사를 통계 내어 나라에 바칠 것 바치고 나머지를 일한 만큼 나누어 먹는다.

농약 투입은 1983년 개체 농업이 시작되면서 본격화 되었다. 집체 농업 때도 농약을 썼지만, 각자가 필요한 때 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 떨어져야 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마른 땅에 쳐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집체 농업 때도 땔나무 조달이나 식생활은 각자 호(戶) 단위로 하였다. 집체 농업에서 개체 농업으로 바뀌면서 전체 경작 면적을 농가 호수로 나눈 경작지가 각 호당 배분되었다. 경작지 분배는 중국 전체가 30년을 주기로 재조정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평등한 상태가 깨지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고 있다.

흑룡강성 신락촌의 품삯

흑룡강성 신락촌 에서는 한족 품을 사서 농사를 지을 경우 품값으로 지출하는데, 1무(畝) 당 가격을 매긴다. 논이나 밭을 세는 단위인 무는 660㎡로 우리나라의 200평(1마지기)에 해당된다. 논갈이는 한 무(畝)에 200위안, 써래질은 200위안, 써레질은 50-100위안이다. 트랙터에 모를 낸 것을 논으로 실어가는 운반비용으로 130위안, 모심기에 한 무당 180-350위안, 가을수확은 250-420위안, 논에서 집으로 볏단 운반비 170-250위안이다. 또한 탈곡 때 본인 탈곡기에 품만 살 경우 하루 20위안이며, 탈곡기까지 가지고 와서 일을 하면 기계 한 대에 70위안과 품값 300-350위안이다. 국가에 공량 할 때 정부에 싣고 갈 경우 한 마대에 1.2위안을 지불한다.

벼 종자의 종류와 입쌀

벼 종자는 조숙종, 중숙종(중조숙), 완숙종(만숙종, 만조숙) 등으로 분류된다. 이 3가지 종자의 심는 시기와 수확도 첫서리가 내리는 10월 초 전후로 한다. 그러나 이삭은 조숙종의 경우 7월 20일경에 나오고, 중조숙은 8월 초순, 만조숙은 8월 10일 이후에야 나온다. 이 일대는 주로 중숙종을 많이 심지만, 요즈음에는 만숙종 재배로 옮겨가는 추세다. 평균기온이 1-2도 정도 낮은 산간 지방에서는 아직도 조숙종을 많이 심는다.

지금까지 나온 종자는 100종이 넘고, 매년 다른 것을 심을 정도로 변화가 심하다고 한다. 그 해 수확량이 많던 종자도 다음해에는 병충해에 약해지는 등 가변성이 많다. 또 따로 정해놓은 판단 기준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좋다고 소문나면, 대부분이 그것을 따라 심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농가는 전문적으로 종자를 개발하는 ‘과학 연구소 농학원’이 추천하는 종자를 심는다.

길림성 회룡봉에서 ‘차닙쌀’은 ‘찹쌀’을 말하고, ‘찹쌀’은 ‘차좁쌀’을 말한다. 이 방언에서 쌀은 벼의 껍질을 벗겨낸 알맹이라는 뜻보다는 볏과에 속한 곡식의 껍질을 벗겨낸 알맹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쌀이라 하는 것은 ‘입쌀’이라 부른다. 차좁쌀을 찹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에 이 지역에서 벼농사가 없어 주식이 좁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식인 좁쌀을 그냥 쌀이라고 부르고 차좁쌀을 찹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논농사 기술과 절차

논농사는 몇 개의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1) 거름내기

거름은 청명 전후로 땅이 녹는 것을 봐가며 낸다. 너무 일찍 내면 갈이를 할 때 두엄자리가 녹지 않아 가대기[쟁기]가 부러지기 쉽다. 거름으로는 가축의 똥과 인분을 사용하였다. 소똥은 썩히지 않고 생것으로 내면 벼가 누렇게 되며 수전보다 한전에 좋다. 논에는 돼지 똥과 인분이 좋은데, 인분은 흙과 3:7의 비례로 한다.

2) 논갈이

논갈이는 양력 5월 초순부터 시작한다. 논갈이를 할 때는 겨리로 하는데 수소와 암소를 함께 메울 경우에는 수소를 왼쪽에 메운다. 수소 두 마리를 메는 경우엔 힘센 소를 왼쪽에 메운다. 이것을 ‘마리소’라고 한다. 논갈이를 할 때는 논에 물을 넣어 땅을 부드럽게 만든 다음에 써레질을 한다.

3) 침종(浸種)

벼 종자에는 조숙종과 개량종이 있다. 침종은 양력 4월 20-25일에 하는데, 맹물에 볍씨 종자의 쭉정이를 걸러낸 다음 독의 물을 채우고 벼 종자는 독안에 놓은 채로 싹을 띄운다. 대략 5-7일이면 싹이 튼다. 침종 처리를 한 벼 종자를 온돌에서 싹을 띄워도 된다.

한편, 3월 중순이 되면 파종 할 때 덮을 흙을 준비한다. 늪과 같은 곳에서 흙을 파와서 체로 곱게 친다.

4) 모 상판 파종

입하가 되면 모 상판에 낙종한다. 모 상판은 논밭에다 만드는데, 모 상판 면적을 논밭 전체 면적의 100분의 1로 한다. 논밭 한 무(畝)에 종자 300근의 비례로 모판에 파종한다. 먼저 논판을 갈아 번지고 물을 대여 써레질을 하여 물이 맑아지면 파종한다. 그전에는 비닐을 씌우지 않는다.

벼 종자를 뿌려 모를 기르기 전에는 먼저 준비된 흙을 한 벌 깐 뒤 그 위에 종자를 뿌리고, 다시 유안비료로 한 벌 덮는다. 물을 준 뒤 그 위에 다시 흙을 한 벌 덮는다. 모판 위의 수위가 2㎝ 정도 되게 한다. 물을 깊이 대면 바람이 불어 파도칠 때 벼 종자가 한데 몰리면 벼 모가 부패 병에 걸리기 쉽다. 부패 병은 흔히 벼모가 반치 가량 자랐을 때 발생한다. 일단 벼 모가 부패 병에 결리면 물을 떼고, 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말려야 한다.

모판에 치는 비료는 인분, 돼지 똥, 닭 똥 따위를 말려 가루를 내여 두병(콩깨묵)을 섞은 것이다. 구들재도 친다. 구들재를 치면 벼 모가 검은색을 빨리 띤다. 화학 비료가 나온 후에는 비료도 쳤다.

5) 모내기

모내기는 하지를 기준으로 삼아 그 이전에 끝내면 된다. 1965년 전에는 논 갈이를 두 번 하였는데, 마른 땅을 한번 갈고 논물을 댄 다음 또 한 번 갈았다. 그때는 농약이 없었으므로 물갈이를 해야 잡풀을 잡을 수 있었다. 1965년 ‘제초제미(除草丁醚)’라는 농약이 처음 나왔는데 그것으로 모판의 피를 잡았다.

모내기에 앞서 써레질을 하여 흙덩이를 깨고 논판을 평평하게 한다. 써레질을 할 때 연변 일대에서는 소를 한 마리 메우고 한반도 이남 사람들은 둘씩 메운다. 써레질 이후 번지질을 하여 논판을 더욱 평평하게 고른다. 이어서 모내기를 한다.

모를 부은 지 32-33일이 지난 후 5월 초순에서 중순 사이에 모심기가 시작된다. 먼저 모를 모판에 실어 논으로 실어낸 다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를 한줌씩 놓는다. 그 다음에는 모를 심는 사람들이 표시된 간격에 맞춰 모를 심는다. 대개 두 줄 사이에 네 포기가 들어간다. 모심기가 완료되면 줄을 옮겨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모와 모사이의 간격은 7-8촌 정도가 보통이다.

모를 심은 지 1주일 후 싹이 올라 올 무렵에 유안 비료에 섞은 농약을 뿌린다. 비가 안 오고 더울 때는 농약의 효과가 오래 가지만, 비가 오면 금새 풀이 자라기 때문에 농약을 자주 쳐야 한다. 논두렁의 풀도 수시로 벤다.

예전에는 모를 심을 때 줄을 맞추기 위해 못줄은 썼지만, 지금은 농촌에 손이 귀해서 줄을 잡아줄 사람 대신 못자리 틀을 쓴다. 이 틀은 6개의 세모꼴 짧은 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박은 가로목에 나루채를 대어 손잡이를 연결한 것이다. 판판하게 고른 논바닥 위에서 사람이 밀고 앞으로 나가면 자리가 생긴다. 논바닥이 단단하면, 이를 세우고 무직하면 낮추어서 자리의 길이를 조절한다. 못자리 틀의 규모는 가로대 길이 143㎝, 손잡이 길이 54㎝, 이빨과 이빨 사이 28㎝, 나루채의 길이 142㎝ 정도이다.

모내기를 하기 전에 집집마다 산에 가서 여러 가지 산나물을 채취하고, 명태 등 해물도 사놓고 청주, 탁주도 빚으며 돼지를 잡기도 한다. 모내기가 시작되면 남자들은 모를 뽑고 나르는 일을 하고, 모를 꽂는 일은 주로 여자와 아이들이 한다. 일손이 딸리면 삯군을 두기도 한다. 모내기철은 1년 농사에서 가장 바쁜 시기이다. 아침과 점심은 일반적으로 논에서 먹는다. 아침에 모를 뜨기에 집에서 밥을 먹을 겨를이 없다. 청주나 탁주는 동이채로 논머리에 가져다놓고 짬짬이 마신다. 모를 꽂을 때 서로 소리를 주고받기도 한다. 자기 집 모내기가 끝나면 삯군으로 나서기도 한다. 모내기가 끝나면 절반 농사는 지었다고 말한다.

6) 김매기

김매기는 두벌 혹은 세벌 맨다. 첫 번째는 알뜰히 매야 하고, 두 번째는 대충 매는데 논판의 물을 흐려놓아도 좋다. 8월 초순 벼이삭이 나올 무렵에 세 번째 김매기를 한다. 이때 서서 앞으로 나가며 돌피만을 뽑는다.

7) 논물관리와 논둑 깎기

논판에 물이 마르지 않게 해야 한다. 모살이를 할 때는 논 코를 ‘흘레코’로 하여 논물을 2.5㎝ 정도로 낮게 한다. 벼이삭이 나올 무렵에는 논 코를 높게 하여 수위를 4㎝ 좌우로 높인다. 논판의 돌피도 논물을 조절하여 잡는다. 처음 나오는 돌피는 걸기(써레)를 놓으면 흙물에 죽는다. 벼모가 한 뼘 쯤 자랄 때 돌피가 싹이 터서 실오리같이 올라온다. 이때 물을 깊이 대면 돌피가 물밑에서 썩는다. 논둑 깎기는 벼이삭이 나올 무렵에 논둑의 풀을 베여 논둑에 퍼놓는다.

8) 벼 베기

벼 베기는 9월 20일이 지나면 시작되는데, 대개 10월 10일 정도까지 계속된다. 올벼는 9월 15-25일에 수확을 하고, 만숙종은 10월 초순까지 한다. 가을을 다그치기 위해 점심을 야외에서 먹지만, 모내기철에 비해 덜 바쁘다.

벼는 30단씩 한 줄로 묶어 20일 정도 세운 채 말린 다음 벤다. 이때 논바닥도 말라서 수레가 들어갈 수 있다. 벼는 낫을 사용해서 벤다.

9) 종자 선택과 탈곡

벼가 다 여물 때 한 뙈기를 선택하여 잡종 이삭은 모두 뽑아버리고, 나머지 벼는 따로 탈곡하여 보관했다가 종자로 삼는다. 벼 종자는 너무 여물어도 안 되는데, 껍데기가 갈라 터지기 때문이다.

벼가 운반되어 들어오면 탈곡이 시작된다. 탈곡은 대략 11월 초순까지 계속된다. 탈곡기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고, 그 이전에는 개상질이나 도리깨질로 벼를 털었다. 1930년대 이후에도 탈곡기가 많지 않아 품앗이 형태로 탈곡을 하였다.

탈곡을 하자면 적어도 일군이 7명은 있어야 하는데 분공으로 이루어진다. 즉, 탈곡기를 딛는 사람 1명, 볏단을 빼는 사람과 나르는 사람 각 1명, 볏단을 탈곡기에 대는 사람 1명, 짚을 나르는 사람 1명, 갈퀴로 탈곡기 앞에 북데기를 끌어내고 낟알을 벼 무지에 쳐올리는 사람 1명, 북데기로 나가는 것을 도리깨로 두드려서 재벌탈곡을 하는 사람 1명 등이다.

1950년대 이전에는 지주의 땅을 소작 맡은 사람들은 탈곡한 벼를 일정한 비례로 나눈다. 자기에게 속하는 벼는 창고에 넣었다가 연자 방아로 찧는다. 때문에 나귀를 기른다. 삯을 주고 찧기도 하며 보통 3-4벌씩 찧는다. 인가가 100호쯤 되는 마을이면 한 두 집에서 연자매를 갖춰놓고 돈벌이를 한다. 소량의 벼를 찧거나 떡가루를 낼 때는 디딜 방아를 이용한다. 정미소는 1930년대 이후에 출현되었는데, 전기가 없는 곳에서는 내연기 발동기 혹은 목탄 발동기를 사용하였다.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쌀을 찧는 마을도 있었다.

10) 판매

탈곡이 끝나면 국가에 판매해야 하는 양만큼은 가마니에 담아 정부에 넘기고, 나머지는 정미를 하든지 정미하지 않은 상태로 보관한다. 1월까지는 거의 모든 작업이 완료된다.

흑룡강성 오상시 신락촌에서는 1990년 말 한 무(畝)당 보통 3,500근의 벼를 국가에 판매하도록 정해져 있다. 토지의 등급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국가에 팔 때 받는 가격은 벼 한 근당 72-76전인데, 시장 가격에 비해 약간 낮은 편이다. 현재의 시장 가격은 쌀 한 근에 1.20위안이므로 벼로 환산하면 벼 1근은 쌀 7량에 해당되며, 벼 한 근의 시장 가격은 0.84위안이다.

시장 가격이 국가가격 보다 떨어질 때도 있는데, 이때 국가가 그 가격보다 높은 보호가격에 벼를 매입해주기도 한다. 근래에는 하얼빈 등지의 큰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나눠 줄 양식을 구입해가기도 하며, 개인이 대량의 쌀을 구입해가기도 한다. 쌀 가격은 낮은 편이고 사람의 노동력에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논농사의 수익은 그다지 높지 않다.

수전 경작 방식의 변화

근래에 와서는 한족에게서 품을 사서 농사짓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 많은 한인들이 한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노동력이 턱 없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력이 있어도 논농사 수입이 적어 일을 잘 안하려고 하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 본인이 농사를 짓기 힘들거나 지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논을 다른 사람에게 부치게 한다. 논을 부치는 사람은 논 주인에게 쌀과 볏짚을 소작료로 내는데, 1무(畝)당 쌀 2,000근과 볏짚 500묶음을 준다.

참고문헌
  • 곽충구·박진혁·소신애, 『중국이주 한민족의 언어와 생활-길림성 회룡봉』(국립국어원, 2008)
  • 김광언, 「농기구」, (『중국 길림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국립민속박물관, 1996)
  • 정형호, 「생업」(『재중교포의 민속-경기 출신 집단 마을 조사 보고서』, 국립 문화재 연구소, 2002)
  • 조경만,「도구와 물질문화」(『중국 요령성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 국립민속박물관, 1997)
  • 조경만,「도구와 농업기술」(『중국 흑룡강성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 국립민속박물관, 1998)
  • 천수산, 『중국조선족풍속』(民族出版社,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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