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복

한자 婚禮服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개념용어 혼인할 때 입는 예복
정의

중국 동북3성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혼인을 할 때 입는 예복.

개설

혼례복으로 신랑은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신부는 노란 저고리와 빨간 치마, 원삼(圓衫), 족두리와 같은 전통 혼례복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에는 양복, 중절 모자, 구두, 파마 머리형 등의 서양 복식이 도입되고 신랑은 양복을, 신부는 흰색 저고리와 치마, 너울을 혼례복으로 입었다.

1950년대의 혼례식에서 신랑은 보통 목으로 만든 감색이나 검은색의 양복을 입었고, 신부는 목을 재료로 한 흰색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너울을 썼다. 이 너울은 보통 ‘조센또’ 천으로 만들었고 길이가 발아래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1960년대부터는 문화 혁명의 이념에 의해서 소수민족 우대 정책이 폐지됨으로써 한인을 상징하는 전통 의복을 착용하지 못하였다. 중산복의 착용이 일반화 되어 혼례식에서도 남녀 모두 중산복을 입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신랑은 보통 중산복에 어울리는 샌또 모자를 썼다. 개혁개방이 된 후 소수 민족의 문화적 독립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전통 의복의 착용이 정부에 의해 권장되자 신부의 혼례복은 다시 한민족 고유의 치마저고리로 바뀌었다.

1980년대 중반에 치른 혼례식 사진을 보면 분홍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신부가 머리에 빨간 꽃을 꽂고 꽃무늬가 약간 든 흰색 너울을 쓰고 있다. 신부의 너울은 지금은 보통 망사천으로 만든다. 신부뿐 아니라 혼례식에 참석한 다른 여자들도 보통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신랑과 남자 하객들의 복장은 양복 보급의 확산에 따라 중산복에서 양복으로 바뀌는 추세를 보인다. 신랑은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짙은 색 양복을 입고 가슴에 빨간색 꽃을 다는 것이 일반적이며 모자는 쓰지 않는다.

변천

여자는 혼례복으로 한복을 입고 남자는 옛날에는 한복을 입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그 후에는 생활복을 입었다. 신부의 옷은 함경도 사람들은 위아래를 한 가지 색으로 해서 입는데 평안도 사람들은 치마와 저고리 색깔을 달리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제보자는 가난해서 한 가지 색깔로 장만할 수 없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더 고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색깔로 해봤자 고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색깔이라고는 검정과 자주색뿐이었기 때문이다. 평안도 사람들은 대부분 다디색[자주색] 저고리에 회색 치마를 입었다고 했다.

① 신랑 혼례복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신랑은 혼례 때 사모 관대로 꾸며 신랑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었다. 단령은 옷깃의 형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곧은 깃의 직령(直領)에 비하여 목둘레가 둥글게 되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조선조 문무관이 상복으로 착용하던 관복으로 흉배를 붙였다. 흉배는 직품을 표시하는 것으로 조수(鳥獸)의 문양을 수 놓아 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였다. 고종 때 문관은 학과 호랑이로 정해졌으며 당상관은 쌍으로 당하관은 홑으로 정하였다. 문무관의 관복에 사용된 이러한 흉배달린 단령이 민가의 혼례식에도 허용이 되어 착용되었다.

단령의 색으로는 남색과 자색의 의견이 있지만 연변에서는 대부분 남색 단령이 사용된 듯하다. 바지 저고리는 소색(素色)을 주로 입었고, 이외 회색이나 황토색을 입기도 하였다. 재료는 광목(廣木), 당목(唐木) 또는 무명, 베였으며 명주(明紬)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혼례복 바지 저고리는 솜을 두는 것이 원칙이지만 가난하여 솜을 놓지 못하는 경우에는 바지허리나 옷고름, 옷섶 등 옷의 어느 부분에 조금이라도 넣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우리나라에서도 30~40년 전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혼례식은 주로 예배당이나 학교 등에서 치러졌고 꽃바구니를 든 화동들이 신랑 신부에게 꽃을 뿌리는 풍습이 생겼다. 구레빠[면, 견, 모직의 방수 제품을 말하는 일본식 표현], 서지[serge, 능직 천을 말함], 단련으로 만든 맞춤 양복을 입고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착용하는 신랑이 많아졌다. 하이칼라 머리[gradation cut style]에 중절모나 캡을 쓰고 털모자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신발은 구두 또는 단련화나 정구화라 하는 운동화를 신었고 왼편 가슴에 조화를 달았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성복에 있어서도 양복이 일상복으로 정착되고 남자들의 정장이 되었고 신랑의 예복이 되었다. 이 시기를 통하여 신식 혼례식이 정착되어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한 양복차림이 혼례복으로 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불안한 사회분위기로 인하여 혼례식을 성대하게 치루기 힘들었다. 따라서 신랑신부 모두 중산복 차림에 모택동 주석의 어록을 가슴에 달고 혼례식을 치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서 개혁개방의 영향으로 경제가 발달하게 되고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자유스러워지면서 신랑의 예복은 전 시대에 많이 입었던 중산복 대신 양복차림으로 바뀌어졌으며 흰색 와이셔츠와 넥타이, 구두와 캡 모자가 80년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자를 쓰지 않는 신랑들이 많아졌으며 앞가슴에 빨간색 꽃을 꽂는 것은 여전하였다.

② 신부 혼례복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한민족의 전통 혼례식에서의 신부 예복으로는 원삼(圓衫)이 사용되었다. 민간에서의 혼례복으로 허용된 것은 녹색이었으나 홍색과 황색도 입혀진 예가 있었다. 원삼 족두리를 구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만 혼례를 올렸으며 손에는 한 폭짜리 명주를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한 느름 수건을 둘러 얼굴을 가렸다. 노란 저고리나 노란 반회장저 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가끔 초록색 신사나 초록색 교직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기도 하였다.

1930년대부터 신부는 흰색 치마저고리를 착용하고 머리에는 너울이라는 베일을 쓰기 시작하였다. 너울은 그 길이가 길지 않고 치마 길이보다 약간 짧은 정도였으며 흰 수갑[장갑]을 끼고 색색의 종이로 만든 조화 꽃다발을 들고 신부의 왼편 가슴에 꽂았으며 흰색 버선과 고무신을 신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는 전 시기에 도입된 신식 혼례식이 정착되어 대부분의 신부들이 흰색 치마저고리와 너울을 착용하였으며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신부의 치마와 저고리는 명주나 벨벳 등의 고급품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마를 가리던 너울은 그 당시 유행된 신식 머리인 파마를 과시하기 위해서 이마와 앞머리를 노출시킨 상태로 착용되었으며 너울은 이전 시대에 비하여 더욱 크고 화려해졌다. 특히 1960년대에는 비날론[vinylon]과 스프사[staple fiber], 금강주 같은 합성 섬유가 신부의 옷감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오간디에 점무늬가 찍힌 천이 너울 감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저고리는 솜저고리를 입거나 여름에 결혼하여 솜을 두지 못할 경우에는 저고리 어느 부분에라도 조금 솜을 두는 풍습은 여전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민족주의 탄압으로 전통 의복 착용이 제한되었지만 그래도 전통 의복이 신부의 혼례복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극도에 달한 60년대 말기와 70년대에는 치마저고리, 너울을 착용하지 못하고 중산복 차림으로 혼례식을 치루게 되었다. 모택동 뺏지를 달고 모택동 어록을 들었으며 빨간꽃과 ‘영광’이라는 리본을 달았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서 다시 혼례식에 관심을 기울여 신부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너울을 쓰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부의 경우 흰 치마저고리 와 너울을 착용하였으며 치마를 풍성하게 하는 경향으로 변하였다. 너울의 높이가 전에 비해 많이 부풀려져 높아졌으며 화려해졌고 이중의 모양을 갖게 되었다. 너울 감으로는 망사가 사용되었고 너울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것도 볼 수 있었다. 옷감은 초치사, 다룬, 빛날이 같은 합성 섬유가 많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산 깔깔이가 유행하였다. 분홍색 예복을 입은 신부의 모습도 볼 수 있으며 최근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도 늘어 가고 있다. 신발은 한국에서 수입되어 온 굽이 높은 꽃고무신 모양의 구두를 신는다. 1990년대부터 혼례복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양식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신부가 조금씩 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신부가 너울을 쓰는 것은 연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원래 이 지역의 평안도 사람들은 너울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그러한 풍습이 전해져서 신부 옷도 위아래를 하나의 색깔로 하고 너울을 쓴다. 한족은 붉은색 옷을 입는데 조선족은 연분홍색을 즐겨 입고 붉은색은 입지 않는다. 너울은 흰색으로 한다. 그러나 혼인에 흰색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혼인 예식에 흰옷을 입지 않는 이유는 상복에 쓰이는 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국립 민속 박물관,『중국 요령성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 (국립 민속 박물관, 1997)
  • 국립 민속 박물관,『중국 길림성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 (국립 민속 박물관, 1997)
  • 국립 민속 박물관,『중국 흑룡강성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 (국립 민속 박물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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