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정풍 운동

한자 延邊 整風 運動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중국 공산당 당원 재교육 운동
관련인물/단체 연변주당위|주정부|주덕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8년 4월
종결 시기/일시 1962년 3월 16일
발생|시작 장소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우의로 1호
종결 장소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우의로 1호 연길시 우의로 1호
정의

1957년 4월부터 1958년 8월까지 연변에서 진행된 공산당원 재교육 운동.

역사적 배경

1957년 4월 중국 공산당 중앙에서는 모택동 주석의 건의로 “관료주의와 종파주의, 주관주의를 반대”하는 거국적인 당원 재교육 운동을 일으킬 것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연변에서의 정풍 운동은 전국의 당원 재교육 운동과는 별개로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정풍 운동으로 치달아 수많은 민족 간부들이 운동 대상으로 되었다.

경과

연변에서의 정풍 운동은 1958년 4월 “지방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민족 단결을 강화하자”는 동원 보고를 발단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 진행된 연변 반우파 투쟁과 서로 어울리면서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486명에 달했다.

연변의 정풍 운동은 2년이 지난 1960년까지 진행되었고 그 여파는 문화 대혁명 까지 이어졌다. 1962년 3월 16일 연변주 당위원회에서는 “반우파 투쟁과 정풍 중에서 잘못 비판하고 잘못 처리된 안건에 대해 심사하여 가릴 사안에 관한 의견”을 발표하여 민족 정풍의 종말을 선고하였다.

결과

연변의 민족 정풍 운동은 불과 2년간 진행되었지만 한인[조선족] 사회에 끼친 해와 입힌 상처는 매우 컸으며 문화 대혁명 기간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가 박해를 받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

연변 정풍 운동과 연변 반우파 투쟁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의 민족 간부들의 정치 파벌 투쟁이 심화되었으며 그 영향은 그 후 20여 년간 계속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연변에서의 민족 자치 권리와 민족 간부의 민족 관념은 크게 약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연변 정풍 운동 이후 한인[조선족]들의 조국관, 민족관, 문화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을 유일한 조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며 중국 내 다른 민족들과의 문화 교류를 통해 한인[조선족] 특유의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출하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 김주영,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레드우드, 2014)
  • 오태호, 『인생에 부친 편지』(요령민족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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