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중국 조선족 사회의 미래, 조선족 교육의 어제와 오늘

한자 中國 朝鮮族 社會의 未來, 朝鮮族 敎育의 어제와 오늘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중국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  
시대 현대/현대
머리말

한반도를 떠나 타국으로 이주한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이미 100년이 넘었고, 그 수 역시 700여 만 명에 이른다. 그들은 서로 다른 국가에서 고유의 한민족 문화를 지키면서도 현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맞아 그들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에 많은 연구자는 그들이 만들어 낸 여러 문화들을 한국학의 영역 확대라는 측면에서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한민족인 200만 한인[조선족] 연구는 광범위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동북 3성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ʻ조선족ʼ 이라고 불리는 한민족은 고난의 한국 근·현대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 정부의 폭정과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조선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860년 청나라 정부가 이 지역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한 뒤부터는 한민족의 중국으로의 이주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한민족들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곳의 조선인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인구조사 소수 민족 인구 통계를 보면, 중국 내 한인[조선족]은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 인구 순위에서 대략 12위 정도를 차지한다. 한인[조선족]들은 주로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등 3성에 살고 있는데, 특히 길림성과 연변지역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내 한인[조선족] 인구는 2000년 전국 제5차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한인[조선족]은 192만 명 정도로 길림성에 115만여 명, 흑룡강성에 39만여 명, 요령성에 24만 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근거로 하면 동북 3성의 한인[조선족] 인구는 전체 한인[조선족] 총인구의 90%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길림성 한인[조선족] 115만여 명은 길림성 총인구의 5% 정도를 차지하고 전국 한인[조선족] 총인구의 60%정도이다. 길림성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조선족자치현 등 두 개의 자치 지방이 있다.

그러나 해외 한민족의 수가 점차 증가하는 반면에 중국 내 한인[조선족] 인구는 1990년 192만 명에서 2010년 183만 명으로, 20년 사이에 9만 명(4.6%)이 줄었다. 중국 한인[조선족]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동북 3성 인구를 살펴보면 연변주가 속한 길림성에 104만 명, 흑룡강성에 32만8천명, 요령성에 24만 명으로 전체 중국 한인[조선족] 인구의 87.8%를 차지한다. 연변자치주는 2010년 인구 통계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인[조선족] 인구가 전체 227만 명중 83만 명(37%)으로 10년 전보다 6만 명 줄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중국 내 한인[조선족] 인구가 대폭 감소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조선족학교 학생의 감소에 따른 학교의 통·폐합이 매우 빨리 진행되어 전체 한인[조선족] 사회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조선족학교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단지 사회 규범과 가치를 가르치고 후대를 양성하는 교육 본연의 차원을 넘어 민족공동체의 결속과 민족문화 창달, 나아가 민족의식을 각인시킴으로써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내 한인[조선족]이라는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창출 및 그들의 경쟁력 신장과 위상 제고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족학교의 교육이 없다면 오늘날의 한인[조선족]도 있을 수 없다. 중국 동북지역 한인은 일찍이 19세기 중엽부터 서서히 중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20세기 초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중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피와 땀으로 땅을 일구었고 자신들의 부지런한 두 손으로 후대를 교육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비록 헐벗고 굶주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들의 교육만은 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중국 한인 교육이 시작되어 100여 년이 지났다.

사실, 현재 중국 내 조선족학교가 안고 있는 문제는 매우 많다. 예를 들어, 학교 운영을 위한 경비 문제, 학교 교원의 고령화, 학교 건물의 노후화, 학교 학생 수의 감소 등이다. 하지만 학교에 학생이 없다면 학교는 그 존재 가치를 잃게 될 것이고 학교의 발전이란 더욱 운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학교에서 학생의 존재 및 그 수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 학교에서 학생 수 감소 문제를 해결하면서 학생 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학교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현재 대다수의 중국 조선족 학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학생 수의 감소이며, 이는 조선족학교의 존폐와 밀접한 관계가 된다.

조선족 학교는 학생 수 감소 문제를 해결하고 학교의 폐교를 막기 위해 오랫동안 많은 방법을 고민해왔다. 그중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보편적인 방법이 바로 한족 학생의 수용이다. 심지어 중국 내 민족 신문은 조선족 학교의 한족 학생의 수용을 문제 해결의 답안처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정말 조선족 학교의 학생 수 감소를 억제하면서 중국이라는 타국에서 예전처럼 학생들에게 민족정체성을 교육하는 등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민족학교로서 여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조선족 교육의 어제와 오늘

현재 중국 동북 3성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조선 말기부터 중국로 조금씩 이주를 시작하였지만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은 1860년 청의 이 지역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한 뒤부터였다. 중국으로의 이주 원인은 조선왕조 말기에는 정부의 폭정과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압록강두만강을 건넜고,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뒤에는 일제의 핍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그들은 중국에서 비록 가난하여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지만,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을 방법은 오직 교육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마을마다 학교를 세웠다. 처음에는 서당 형식으로 운영되다가 1906년 이상설용정에 한인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면서 곳곳에 수없이 많은 한인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현재 중국 동북 3성에 자리 잡았던 조선족 학교는 한인[조선족]들의 해외 이주, 중국 내 대도시로의 이주, 출생률 감소 등으로 그동안 착실히 진행되었던 한인[조선족] 교육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동북 3성의 조선족 학교의 감소 추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910년에는 길림성 간척민의 학교가 모두 40개였고, 1920년대에는 더욱 늘어 1928년 기록에 의하면, 중국길림성 조선인학교는 모두 628개에 학생 수는 31,878명이었고 교원 수는 1,203명이었다. 동북국 민정국 자료에 의하면, 1949년 3월 동북 3성에 조선족 중학교는 70개이며, 교원은 550명, 학생은 16,700명이었다. 소학교는 1,500개이며, 교원은 5,500명, 학생은 180,000명이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중국공산당이 이끌게 되었다. 이후 학교는 모두 정부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51년 동북 3성 지역의 조선족 학교의 수는 모두 1,297개가 존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동북 3성의 조선족학교 수와 학생 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길림성의 경우, 1949년 소학교는 662개, 학생 수는 121,630명이었고 중학교는 40개, 학생 수는 15,474명이었다. 1965년에는 소학교 839개, 학생 수는 208,424명이었고, 중학교는 221개, 학생 수는 56,995명이었다. 1985년에는 소학교 555개, 학생 수는 85,804명이었고, 중학교는 100개, 학생 수는 51,214명이었다. 요령성의 경우, 1965년에는 소학교 175개, 학생 수는 26,969명이었고, 중학교는 14개, 학생 수는 6,686명이었다. 1985년에는 소학교는 224개, 학생 수는 19,484명이었고 중학교는 34개, 학생 수는 11,458명이었다. 흑룡강성의 경우, 1949년에는 소학교 274개, 학생 수는 37,562명이었고, 중학교는 13개, 학생 수는 3,358명이었다. 1957년에는 소학교 319개, 학생 수는 39,146명이었고, 중학교는 16개, 학생 수는 9,348명이었다. 문화대혁명 직전은 흑룡강성 조선족 교육의 전성기였다. 소학교는 419개, 학생 수는 54,111명이었고, 중학교는 34개, 학생 수는 10,873명이었다.

1988년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학교 수는 모두 소학교 1,110개, 중학교 195개로 합계가 1,305개이다. 이때까지는 조선족 학교와 학생 수는 감소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큰 변화 없이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중국 한인[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이후의 상황을 보자. 1993년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학교 수는 모두 소학교 1,121개, 중학교 231개로 합계가 1,352개이다. 이때까지도 조선족 학교와 학생 수는 큰 영향없이 발전하였다.

그런데 한중수교 이후 10년이 지난 조선족학교는 어떻게 변했을까? 2002년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학교 수는 모두 소학교 325개, 중학교 155개로 합계가 480개이다. 한중수교를 이후 10년이 지난 2002년 조선족 학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특히 소학교의 감소가 두드러졌다. 이는 향후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학생 수 감소가 예상되는 현상이기에 더욱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5년 현재 중국 동북 3성의 조선족 학교가 얼마나 많은 학교가 빠르게 감소하였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조선족 학교의 폐교는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럼, 천여 개가 훨씬 넘었던 조선족 학교가 이렇듯 10여년 만에 그 수가 급감한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한인[조선족]들의 연안 도시 및 대도시로의 이주이다. 동북 3성을 중심으로 농촌지역에 집거지를 이루면서 살았던 한인[조선족]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북경, 상해, 청도 등 대도시로 나갔고, 그 결과 동북 3성의 인구가 격감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족 학교의 학생이 줄어들었다.

둘째, 한인[조선족]들의 해외 이주이다. 특히 한·중수교 이후 한인[조선족]들의 한국행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학생 수 감소의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한인[조선족] 여성들의 국제결혼이다. 한중수교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한인[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는 중국의 한인[조선족] 신생아의 수가 저조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한인[조선족] 신생아의 출생률 저조는 바로 조선족 학교의 취학아동의 수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으로 조선족 소학교들은 1990년대 중기부터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셋째, 한인[조선족]의 저출산 현상이다. 한인[조선족] 여성들의 지위와 학력 수준의 향상으로 예전처럼 육아를 담당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혹은 좀 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위해 소수 민족 우대정책으로 아이 두 명까지 낳을 수 있지만, 하나만 낳아 키우자는 추세로 변하였다. 그 결과 출생률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이것은 수입이 낮은 일반 직장인이 아이 하나 더 키우려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생겨 포기하는 한국과 비슷하다.

넷째, 한인[조선족]의 한족학교 입학이다. 중국어를 몰라 어려움을 당했던 일부 학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은 한족학교에 보내 중국말을 배워 중국사회에 잘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족학교에 보낸 것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부모가 되면 조선말을 할 수 없어 당연히 자신의 아이들도 한족학교에 보내게 되는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중학교의 경우, 한족들이 많은 특수한 언어 환경에서 자란 한인[조선족] 학생들 대부분이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 소학교 졸업 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조선족 중학교를 가기보다는 차라리 조건이 좋고 다니기 편리한 인근의 한족 중학교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외의 원인에는 조선족 마을에 있던 학교가 폐교되거나 합병되면 멀리 있는 기숙사가 있는 조선족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비용이 부담스러워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동북 3성의 조선족학교 숫자의 변화와 학생의 변화를 각 성별로 자세히 알아보자.

1. 길림성

중국 한인의 초기 교육은 마을마다 서당을 설립하여 실시하였다. 이때의 교육은 조선어와 더불어 보통 조선의 서당에서 배우는 『사서』, 『오경』 등의 유교 교육을 주로 실시하였다. 1903년 청나라 정부가 ≪秦定學堂章程≫을 반포한 후, 길림성 조선인들은 학당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천주교회는 훈춘에 조선인유치원을 설립하였고, 1906년에는 독립운동가 이상설길림성 용정에 조선인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이후 1907년 3월에는 이동춘용정양정학당, 1908년에는 이성유가 연길에 창동서숙(창동학원), 김립이 연길 소영자(小營子)에 광성서숙(광성학교), 박무림과 김학연이 화룡에 명동서숙(명동학원), 강백규와 유한이 화룡에 정동서숙(正東書塾)을 등을 계속해서 설립하였다.

이후 1910년에 길림성 간척민의 학교가 모두 40개소로 늘었고, 1928년에는 중국길림성 조선인학교가 모두 628개소에 학생 수는 31,878명이었고, 교원 수는 1,203명이었다. 1935년 길림성의 조선인 학교는 모두 353개소에 학생 수는 46,121명이었다. 1944년 간도성『文敎要覽』의 기록에 따르면, 연길시와 주변 다섯 개 현에는 조선인소학교 474개소, 학생 84,887명이 있었고, 길림성의 조선인 중학교는 21개소 7,057명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에는 조선족 사립학교는 거의 공립학교로 바뀌었지만 학교 수는 계속 늘어났다. 1949년 3월 동북민정국의 통계에 의하면, 길림성에는 소학교 662개소, 중학교 40개소가 존재하여 모두 702개소의 학교가 있었다. 1965년 길림성에는 소학교 1,071개소, 중학교 221개소가 존재하여 모두 1,292개소의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조선족 학교 수가 줄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 후반에는 그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1985년 길림성에는 소학교 555개소, 보통중학교 100개소, 고등교육기관 3개소, 중등전문학교 6개소가 존재하였다. 1993년에는 소학교 589개소, 중학교 83개소가 존재하여 모두 672개소가 길림성에 존재하였다. 2002년은 조선족 학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소학교 180개소, 중학교 83개소가 존재하였다. 2010년에는 소학교 47개소, 중학교 42개소가 존재하여 모두 89개소가 존재하였다.

2. 흑룡강성

흑룡강성의 한인은 제일 먼저 목단강지구의 녕안현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자리잡은 한인들은 1908년 이곳에 흑룡강성 최초의 조선인 근대학교 고안촌초등소학당을 세웠다. 이 학교는 당시의 청(淸) 정부에 등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淸) 정부의 지지와 경제적 원조를 받은 정식학당이었다. 따라서 이 학교에서는 청나라 정부에서 제정한 계묘(癸卯)학제를 따랐으며 초등학당의 수업년한은 5년이었고 고등학당의 수업년한은 4년이었다. 이를 계기로 흑룡강성에는 근대적인 학교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한민(韓民)학교와 하얼빈시 조선인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세운 동흥(東興)학교가 그 대표적인 학교이다. 이들 학교는 모두 반일 또는 강한 민족성을 띤 민족사립학교로서 당시의 반일구국운동을 위해 반일투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후 조선인학교는 꾸준히 증가하여 만주사변 전까지는 60여개 교까지 증가하였다가 1933년 상반기에는 24개교밖에 남지 않았으며 교원 52명, 학생 1992명뿐이었다. 1945년 만주국 시기 흑룡강성 조선인중학교는 14개교였고 학생 수는 2,800명이었다. 소학교는 263개교였고 학생 수는 24,667명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될 당시 흑룡강성에는 20만 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조선족 소학교가 274개교로 학생 수는 각각 37,562명이었으며 그 때 학령아동의 취학률은 90%였다. 또한 조선족 중학교는 13개교가 있었으며 학생 수는 3,300명이었고 그 때 총인구에서 중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6%였다. 1957년 흑룡강성에 319개교의 조선족소학교는 1958년에 347개교로 늘어났고, 중학교 역시 6개교의 완전중학교와 10개교의 초급중학교에서 1958년에는 완전중학교가 10개교로 발전하였고 초급중학교는 5개교가 더 늘어났다. 유치원 교육 역시 많은 발전을 하였는데 1950년대 중기부터 정규화한 상설유치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956년에는 36개교의 유치원이 있었고, 1965년에는 64개교로 증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족 소학교가 419개교로 증가하였고 조선족 중학교도 34개교로 증가하였다. 문화대혁명 이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흑룡강성 조선족 교육은 최고의 발전을 누리게 된다. 민족교육사업을 활발하게 벌였고 중국 정부도 민족적 특성을 존중하였다. 또한 1982년부터는 소학 6년, 초중 3년 고중 3년인 학제를 실시하였다. 1977년 흑룡강성 조선족 중학교는 182개교로 급격히 늘어났고 재학생은 27,703명이었다. 조선족 소학교는 327개교로 다소 줄어들었고 재학생은 42,732명이었다. 1988년 흑룡강성 조선족소학교는 모두 405개교이었으며, 재학생은 35,422명이었다. 조선족 중학교의 경우는 모두 85개교이었으며 재학생은 20,748명이었다. 1993년의 기록에 의하면, 흑룡강성 조선족 소학교는 380개교였고, 그 재학생은 34,975명이었다. 조선족중학교는 68개교였고 그 재학생은 16,925명이었다. 그런데, 2006년에 조선족 학교의 통·폐합으로 흑룡강성에 존재하는 조선족 학교는 모두 58개교로 줄어 들었다. 2012년 필자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소학교 23개소, 중학교 16개소, 통합 조선족학교 9개소 등 모두 48개소가 존재하였다.

3. 요령성

1920년 이전 심양에는 서당의 경우 동선서당(東鮮書堂), 북산창흥서당(北山昌興書堂), 대동촌서당(大東村書堂) 등 9곳이 있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서당의 현대화가 이루어져 현대식 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심양지역 최초의 현대식 교육을 실시한 조선인학교는 1928년 9월에 심양현(沈陽縣) 오가황(吳家荒) 삼십리보(三十里堡)에서 개교한 신흥학교(信興學校)였다. 이 학교는 현지 한인인 윤익선(尹翼善)이 발기하고 조선인 기독교회가 협조하여 세웠고, 개교 초기 3개 반 40여명의 학생과 3명의 선생님을 두었다. 또한 조선이 일본에 강점된 이후에는 많은 반일인사들이 이곳으로 이주함에 따라 반일민족학교, 군사학교, 무관학교 등이 생겨났고,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인재양성이 실시되었다. 9·18사변 이후 일본이 이 지역을 차지한 뒤에는 이곳의 소학교는 모두 일본학교와 같이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로 개명을 하였고, 후에 다시 ‘재만국민학교(在滿國民學校)’로 개명하였다. 1936년 요령지구 조선인 초등학교 숫자를 보면, 보통학교 67곳, 기타학교 63곳, 서당 33곳, 유치원 6곳, 특수학교 16곳이 존재하였다. 1941년 조선인 중등학교는 4곳이 있었다. 일제가 패망 후 이 지역은 국민당 정부가 관리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기 전까지 이 지역 조선인학교는 소학교 150여 곳, 중학교 5곳이 존재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지금의 신빈현에 진주한 후 ‘조선족독립동맹’(이듬해 ‘조선민주동맹’으로 개칭)을 조직하여 조선족학교 교육의 회복과 발전을 지도하였다. ‘조선민주동맹’은 1946년 신빈현에 3년제의 조선족신광중학교를 설립하고 100여명의 학생을 모집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에는 정부의 관리 하에 모든 학교들이 정돈되어 계획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소학교는 구체적인 통계는 없지만 많이 존재하였고 중학교는 5곳에서 771명이 재학하였다. 1965년에는 소학교는 175곳에서 26,969명의 학생이 재학하였고, 중학교는 14곳에서 6,686명이 재학하였다. 1977년에는 소학교는 112곳에서 17,146명의 학생이 재학하였고 중학교는 60곳에서 11,677명이 재학하였다. 1980년대는 조선족 학교가 가장 번성한 시기로, 1985년 소학교는 224곳에서 19,484명의 학생들이 재학하였고 중학교는 34곳에서 11,458명이 재학하였다. 1993년 요령성에 존재했던 조선족유치원은 46곳이고 재학생이 3,671명이었다. 조선족소학교는 단독학교가 152곳이었고, 한족반의 조선민족반이 52곳이 있었으며 재학생은 18,468명이었다. 조선족 중학교는 30곳이었고 재학생은 9,231명이었다. 이외에 중등사범학교 1곳에 재학생 505명이 있었다. 2002년에는 학교 수가 크게 줄어 조선족 소학교의 경우 58곳, 조선족 중학교는 29곳이 존재하였다. 2013년 2월 필자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조선족 소학교는 11곳, 조선족 중학교는 10곳, 조선족 유치원, 조선족 소학교, 조선족 중학교를 통합하여 운영하는 12곳의 통합조선족학교가 존재하였다.

맺음말

중국 한인[조선족]의 급격한 인구감소와 이에 따른 집거지의 붕괴, 그리고 중국정부의 동화정책은 중국에서 살아가는 한민족 한인[조선족]에게 새로운 위기의식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인[조선족]의 장래를 결정짓는 것은 후세 교육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학교가 교육의 기본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민족의 진로가 좌우된다 할 것이다. 교가는 바로 학교 교육의 기본 방향 중 하나이다. 본래 교육의 보편적 목표와 참뜻은 자라나는 2세들로 하여금 인격과 소양을 갈고 닦는 데에 있다. 그러나 예부터 조선족학교에서는 시대적 혹은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당면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특별히 강조하는 교육 부분이 있었다. 즉 조선족 학교 교가는 1945년 광복이전에는 반일정신과 민족정신을 학생들에게 교육하였다. 조국은 외세에 의해 강점당하고 있고, 이역고도(異域孤島)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며 조국광복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중국 조선인으로서는 반일정신과 민족정신을 제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수많은 조선족 학교는 다양한 교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교육시켰다. 이러한 과거 조선족 학교 교가 교육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부딪쳐야 할 여러 가지 민족 위기에 대해 그 극복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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