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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야기

한민족 역사가 숨 쉬는 하얼빈시 조선족의 문화 중심, 하얼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

한자 韓民族 歷史가 숨 쉬는 哈爾濱市 朝鮮族의 文化 中心, 哈爾濱市 朝鮮 民族 藝術館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기관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현주소 흑룡강성 하얼빈시 도리구 안승가 85호
정의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거주하는 한인[조선족]들의 문화와 관련된 정책과 사업을 수행하는 공익성 문화 사업 기관.

한민족 역사가 숨쉬는 하얼빈시 조선족의 문화 중심, 하얼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

하얼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은 공익성 문화 사업 기관으로 하얼빈시 조선 민족 및 타 소수 민족의 문화 생활을 풍부히 하고 민족 정책을 선전하며 민족 단결을 추진하고 조화로운 민족 관계와 민족 문화를 구축하는 조선족 문화관 중 하나이다. 예술관 인원 편제는 35인이며 현직원은 28명으로 문예 보도부, 아동부, 미술부, 촬영부, 대외 교류부, 송화강 편집부, 인사교육과, 행정사무실 등의 부서를 두고 있다. 2006년 하얼빈시 정부는 자금을 지원하여 예술관 새 관사를 개조하였다. 새 관사는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기초 시설이 잘 갖춰져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새 관사의 예술관 내에는 안중근 기념관, 조선족 민속 박물관, 하얼빈 조선족 백 년 발전사 기념관, 조선족 도서관 등 기능 부문이 신설되었고 조선족 노년 활동 중심, 다기능 전시홀, 소극장, 성악교실, 기악교실, 무용교실, 미술교실, 촬영스튜디오, 영상제작실 등 29개의 예술보도 교실과 문화 활동 시설이 설치되었다. 현재 예술관은 하얼빈시에서 유일하게 교육, 훈련, 기획, 전시 등 기능을 구비한 소수 민족 문화 활동의 중심이다.

우여곡절의 성장기

초창기 예술관은 도리구 중앙대가 39호에 자리 잡았는데 청사면적이 250㎡였고 직원은 5명이였다. 하얼빈시 인민 정부 문교국의 직속 단위로서 정부에서 직원들의 임금과 약간의 사업비용을 주었다.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민족의 문화 생활을 풍부히 하기 위한 것이기에 직원들의 사업 열정은 매우 높았다. 사회 청년들로 '선전대'를 조직하여 나라 정책을 선전하고 시사 보고를 하는 이외에 명절 때마다 문예 공연을 했고 주말 무도야회를 조직했으며 해마다 한번 씩 문예 공연, 하향 순회 공연을 하여 군중의 문화 생활을 다채롭게 해주었다.

1959년에 이르러 문화관의 직원은 15명으로 늘어났고 설비 확충과 함께 사업 범위도 확대되었다. 특히 문학잡지 『송화강』을 창간하여 흑룡강 땅에 처음으로 한인문학의 터전을 마련했다. 『송화강』은 당시 중국에서 '연변문학' 다음으로 일찍 창간된 한인 문학잡지였다. 그리고 2년제 하얼빈 조선 예술 학교를 꾸려 60여 명의 예술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그중 20명이 국내외 전문 예술 단체로 수송되었다. 이외에도 무용, 음악 훈련반을 꾸려 후진을 양성하였다. 사업의 확장에 뒤따른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내연기 수리 공장, 암풀 공장 등 소형 기업을 꾸려 문화 활동의 경비를 보태였다.

문화 대혁명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문화관의 사업은 중국 공산당의 제11차 3중 전회 이후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986년에는 조선족 문화관에 소속되는 조선 민족 문화 궁전이 낙성되었다. 이 문화궁전에서는 연변가무단, 공연단 등 국내의 예술 단체들이 수십 차례 공연을 가졌으며 한인 문화 활동의 조직과 예술 인재 양성에 기여하였다.

1987년 예술관에서는 예술단을 창립하였다. 예술단은 하얼빈 시내와 교외 지역, 그리고 부근의 현이나 시에서 수차례 순회 공연을 가졌다. 예술단은 하얼빈시, 흑룡강성과 동북 3성의 여러 문예 콩쿠르에서 총 34종의 상을 수여받았다. 1989년에는 성공적으로 미국 12개 도시를 순회 공연하여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중국문화부와 미국주재 중국대사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얼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은 1990년대에 들어서 국가 경제 건설의 발전에 따른 시장경제와 개혁개방에 적응하여야 하였고 점점 높아지는 한인[조선족] 대중의 문화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상을 해방하고 관념을 변화시켜 예술관 사업을 시장 경제 사회의 무대로 떠올려야 했다. 이에 정부의 지령대로 정부에서 주는 자금으로 해왔던 문화 사업을 '사회 대문화 사업'으로 승화시켰다. 예술관에서는 성급 이상 상을 탄 인기가수, 인기무도가들을 무어 전국 각지를 순회 공연해 대성공을 이루었다. ‘최경호 음악회’를 진행해 흑룡강성 조선족 사범학교 건축 공정에 의연금 10만 위안을 모아 민족 교육사업을 지원했다. 하얼빈시 제24차 음악회를 위해 백만 위안의 기부금을 모았고 이 일을 힘껏 도운 한국 기업가 김인회 회장은 하얼빈시 정부로부터 하얼빈시 영예시민 칭호를 수여 받았다. 1998년 하얼빈 대홍수때 하얼빈시 조선족 위문단을 조직하여 송화강변에 나가 대홍수와 싸우는 인민 해방군에게 위문 공연을 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1999년 치치하얼시 교구 한인[조선족] 이재민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기부 의연을 조직하여 이재민들에게 8만근의 입쌀을 지원했다. 이 혈육의 정은 특대뉴스로 보도디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15년간이나 정간되었던 『송화강』잡지는 1981년 12월 5일에 복간되어 2005년 말까지 총 183기를 발행하여 한인[조선족] 작가와 시인들의 주요한 원지의 하나로 되였으며 새로운 한인 문화 일군을 배양하였다. 지금 출판되고 있는 『송화강』잡지는 다채롭고 예쁘게 꾸려져 전국의 일류 잡지들과 어깨 나란히 하고 있다.

하얼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에서는 1995년 6월 2일 하얼빈시 제1회 조선족 민속 문화 축제를 열었다. 축제에 4만여 명의 한인들이 모였고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문화부와 성, 시 지도자들의 긍정을 받았으며 국내외 벗들의 높은 찬양을 받았다. 민족적이고도 대중적인 민속축제는 이미 제4회까지 진행되었다. 2004년 8월에 열린 중국하얼빈 조선족 민속 문화 축제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공연에 참가한 배우만 해도 수천 명이 되였고 표현 형식이 다채로웠으며 민족 특색이 선명하였다. 특히 지역 간의 경제 문화 교류와 공동 발전을 촉진하는 교량 작용까지 하여 광범한 영향을 일으켰다.

문화교류의 꽃을 피웠다

예술관은 대외 문화 교류를 위해 차례로 한국 창무 예술원의 무도단, 부산 시립 예술단, 한국 국립 예술단, 조선 국립 예술단, 조선 피바다 예술단이 방문하여 하얼빈의 예술무대를 더욱 다채롭게 빛냈다. 그리고 한·중 수교 5주년 때도 한국에 가서 기념공연을 했다. 1993년과 1996년 두 차의 세계 한인 예술제에 참가하여 공연을 했고, 1997년에 열린 세계 한인 가수 노래 콩쿠르에서 예술단의 가수 최련화는 대상을 차지했다.

예술관은 총 30여 차례의 교류 공연, 전시회, 방문 행사를 조직하였는데 하얼빈시는 조선(북한), 한국과의 문화 교류 중에서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2006년, 하얼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은 한국의 유명한 민간 예술 공연 단체인 남사당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2009년 안중근 기념관은 한국원진사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향후 더욱 광범위한 교류 활동을 하기 위하여 좋은 기반을 마련하였다.

예술관에서는 50여 년간 전국 소수 민족 문예 경연대회, 전국 부분성시와 자치구경영대회, 조선족 소년 아동 예술절, 흑룡강성과 하얼빈시의 소수 민족 문예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수많은 상장을 받았다. 대략적인 통계에 의하면 2000년 건관 50주년까지 국가급 상 28가지(국제상 2차를 포함), 동북 3성과 성급 상 49가지, 시급 이상의 상은 133가지를 수여받았다. 예술관은 또 하얼빈시 문화국의 '위문 공연 선진 집체', 국가 문화부와 하얼빈시 정부의 제24기 하얼빈의 여름 음악회의 '우수 조직 활동 단위상', 하얼빈시 정부의 건국50주년 계열 활동의 '특수 공헌상', 중공 하얼빈시위와 시정부의 '당풍건설선진집체', '민족 단결 진보 모범 단위' 등의 영예를 수차례 안았다.

예술관의 독특한 실력과 성적, 그리고 효과적인 작용은 정부의 인정을 받아 흑룡강성내 예술 관중에서 유일한 전국2급 예술관이며 흑룡강성 1급 군중 예술관으로서 처급 대우를 받고 있다. 예술관 관장 서학동은 2005년 '전국선진사업일군'의 영예로운 칭호를 수여받았다. 2008년에는 성급 문명 단위, 국가 문화부의 국가부 성급1급관의 영예를 받았고 2009년에는 국무원에서 수여한 '전국 민족 단결 진보 모범 단체'의 칭호를 받았다.

본 민족 문화 사업을 잘 이어가는 기반 위에 조선 민족 예술관은 정부가 주최한 여러 대형 활동 중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근래 하얼빈 국제 빙설제, 하얼빈의 여름음악회, 국경절 축하공연 등 대형 행사 때 한국 예술 단체를 초청하거나 광장 공연을 조직하는 등 임무를 대행하였다.

잡지 『송화강』을 펴내다

1959년 5월 20일에 문학잡지 『송화강』을 창간하였다. 『송화강』은 그 당시 ‘연변문학’ 다음으로 중국에서 가장 일찍 창간된 한인 문학 잡지였다. 이 잡지는 처음 부정기간물로서 『송화강』 편집실에서 직접 발행하였으며 매 회 2000부씩 인쇄하여 한 권에 12전씩 수금하였다. 창간호를 발간하면서 편집후기에 “『송화강』은 하얼빈시의 한인들의 문예간물로서 창작을 지망하는 동무들의 좋은 ‘문예원지’로 되며 광대한 독자들의 좋은 정신적 양식으로 벗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화강』의 창간을 위하여 2~3년간의 준비과정을 걸쳤다. 당시 민족 사업을 하던 서명훈은 ‘흑룡강 일보’[1957년 6월 6일 한문판]에 ‘조선 민족 문학의 발전을 관심하여야 한다’는 문장을 발표하여 한인 작가들이 문예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한인 문예 간행물을 창간할 것을 발의하여 여론을 조성하였다. 동시에 하얼빈시조선족문화관과 상의하여 문화관에서 문예 잡지를 꾸리기로 합의하였고, 문화관 명의로 문화국과 민족사무위원회에 보고를 올렸다. 서명훈은 연변자치주 주장 주덕해와 서로 아는 처지라 그에게 편지를 써서 편집할 이들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전억렬 관장이 이 편지를 가지고 직접 가지고 연변에서 주덕해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도움 하에 ‘연변문예’잡지 부총편인 김창석이 하얼빈에 파견되어 왔다. 그리고 오상에 있던 시인 이삼월이 하얼빈으로 파견되어 편집 인원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송화강』잡지는 그 시대 하얼빈시와 흑룡강성의 유일한 종합성 문예 간행물로서 당의 보살핌과 광대한 한인[조선족] 문예 애호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송화강』에 발표된 작품들은 주로 하얼빈시와 흑룡강성 내 한인[조선족] 노동자, 농민과 지식인들의 문예 작품을 발표하여 하얼빈시와 흑룡강성 내 한인[조선족]들의 문화 생활을 만족시키고 문예 창작 기반을 다졌으며 한인[조선족]의 문화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우리 송화강'으로 군중의 환영을 받았고 신임을 얻었으며 군중 속에 뿌리를 박았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문예계가 첫 방망이를 맞았다. '4인 무리'들이 득세한 탓에 『송화강』잡지는 1966년도까지 6년간 36기를 출판 발행하고 정간되었다. 이뿐이니라 이 잡지에 실렸던 수백편의 혁명적 문예작품들이 중국 공산당을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며 모택동 사상을 반대하는 '독초'로, 문제 있는 작품으로 지정되어 수십 명의 작자들은 억울한 죄명을 쓰고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10년 동란시기 소수민족 언어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자본주의에로 '퇴보'하는 것이며 '복귀'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민족의 소멸과 민족 언어문자의 소멸정책을 썼다.

하얼빈시 조선족 문화관에서 공연을 조직하여 나갈 때는 한어로 된 본보기극을 공연하라 하면서 한인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배우들이 전통 복장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1968년에 가서는 아예 조선 문화관의 간판을 떼고 문화관 사무실은 주민이 점하고 간부들은 분산시켜 5년 동안 한인[조선족]의 문화 활동이 중지되었다가 1973년에야 하얼빈시 조선족 문화관의 간판을 다시 걸게 되었다.

당의 3중전회이후인 1980년 4월에 하얼빈시에서는 국가 민족사무위원회의 지시에 의해 “민족정책 재교육 집행정황 검사”가 진행되었다. 이 검사에서 『송화강』잡지문제가 제기되었고 회복하도록 결정지었다. 이리하여 『송화강』잡지는 정간되어 14년만인 1981년 12월 5일에 복간호 총제 37기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송화강』잡지는 격월간 정기간행물로서 하얼빈시 우정국을 통해 공개발행하게 되었다. 출판경비는 하얼빈시 민족 사무 위원회 사업비 예산에 넣어 하얼빈시 재정에서 매년 2만 위안씩 보조하여 해결하였다. 편집인원은 주필에 서재수, 편집원으로 이삼월, 김종운 세 사람 이였으나 그 후 5명으로 증가되었다.

한때 정간의 아픔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지만 전국에 몇 개 남지 않는 우리말 잡지를 고수하려고 일념으로 지금까지 견지해왔는바 2006년부터는 청도에 진출하여 활력을 되찾고 있다.

조선족 민속 박물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걷는다

하얼빈 조선 민족 예술관의 2층에 위치한 조선족 민속 박물관은 2006년 7월 1일 정식으로 개관하였다. 500평 정도의 공간에서 한인의 의, 식, 주를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농경을 위주로 하였던 한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모형들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그 당시 한인의 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생활, 문화, 복식 등 16 종류의 304가지 민속 전시품이 전시되어 있어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한인들의 민속 문화를 볼 수 있다. 2012년에는 하얼빈조선족 민속 박물관은 증축 공사를 마쳤고 시민들한테서 무상으로 증정 받은 전시품 100여 개를 전시하였다. 그 증에는 100여 년의 역사가 있는 가야금이 있는데 이것은 성급 2급 문화재로 선정되었다. 하얼빈 조선족 민속 박물관에서는 정기적인 전시 외에 여러 가지 단기 전시도 시도하였다. 선후하여 한인 전통 예의전, 한국 공예품전, 조선 서화 공예품전, 하얼빈시 소수 민족 서화전 등 전시회가 열려 하얼빈시 한인[조선족]을 비롯한 타민족들에게 새로운 여가 생활을 제공하였다. 조선족 민속 박물관의 개관 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이며, 수요일은 휴관한다.

참고문헌
  • 서명훈, 『할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중국 민족 출판사, 2009)
  • 「북국의 하늘에 우렷이 떠오른 우리 예술의 큰 별」(『문화 시대』, 하얼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 2011)
  • 金江蓮, 「論民俗博物館在哈爾濱市朝鮮民族民俗文化保護工作中的重要作用」(『學理論』, 2012)
  • 柳美蘭, 「하얼빈市朝鮮民族藝術館硏究」, (『延邊大學碩士論文』, 2013)
  • 할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 (http://hrbcyg.com/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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