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원

한자 李浩源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한족회 한족신보 편집인|광한단 간의부위원|조선 혁명당 중앙 집행위원장|조선 혁명군 사령부 부관장|한교연합회 문화부장|조선 혁명 동지회의 주석|길림성 조선인 민주 연맹 주석|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과 교수|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
출생 시기/일시 1891년 4월 11일
활동 시기/일시 1920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28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월 19일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몰년 시기/일시 1978년 5월 1일
출생지 충청남도 공주
거주|이주지 만주
활동지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활동지 관전현 향로구
활동지 봉천성 신빈현 왕청문
활동지 봉천성 신빈현 왕청문
활동지 봉천성 신빈현 왕청문
활동지 봉천선 신빈현 왕청문
활동지 길림성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한족회, 광한단 등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조선혁명당의 집행위원장으로서 독립군을 이끌다가 1932년 이른바 ‘신빈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이호원은 충남 공주(公州)에서 태어났으며, 이호언(李浩彦), 강덕재(康德載)라는 별명으로도 활동하였다. 이호원은 고향에서 교원양성소를 마치고 공립 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고 1916년 중국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조직된 한족회(韓族會)에 참여하여 기관지인 「한족 신보(韓族新報)」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이어 1920년 5월 현정경(玄正卿)·이시열(李時說)·현익철(玄益哲)·김석손(金錫巽)·홍원경(洪元京), 장명환(張明煥)·김관성(金觀聲)·이춘산(李春山)·김태호(金泰浩)·박정호(朴正鎬) 등과 함께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광한단(光韓團), 일명 의흥단(義興團)을 조직하고 간의부(幹議部) 위원에 선임되어 단원들의 군자금 모집을 지도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의 지도에 따라 동단 소속의 김준경(金俊京) 등은 국내에서 28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호원은 이와 같은 활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법정에서 "일본은 반적배(反賊輩)를 협박하여 조선국권을 박탈하고 조선의 민복(民福)을 증진한다고 칭하며 병합 초부터 한민족의 종교 예술을 억압 소멸하고 농공상(農工商)을 박탈 삭자(削資)하고 3,000리 성역(聖域)은 국방, 안녕 유지라는 명목으로 현세의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일제의 침략상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질타하였다. 결국 이호원은 1921년 6월 7일 평양 복심 법원에서 소위 제령(제령) 7호로 징역 10년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1921년 7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감형으로 1928년 출옥하자 즉시 가족들과 함께 봉천성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재개하였다. 이곳에는 재만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설립한 화흥 중학교(化興中學校)가 있었는데 이호원은 이 학교의 교원이 되어 항일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9년 11월 화흥 중학교 내에서 현익철, 현정경 등이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 창립총회를 개최할 때 이에 참여하여 중앙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호원은 노동·농민·자치·군사·교육 및 재정 등의 정책과 당헌(黨憲) 10조의 제정을 주도하는 등 핵심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30년 8월 신빈현 사첨에서 개최된 동당의 제3회 중앙 집행위원회에서 상무 집행위원, 선전위원회 교양부 집행위원장 등의 요직을 맡았다. 이호원은 「만주정세」 등의 팜플렛과 선전전단을 제작 배부하여 지역 교민들을 항일 운동의 지원 세력으로 견인하는 등 세력 확장에 힘썼다. 1931년 중앙 집행위원장 현익철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중앙 집행위원장 및 정치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최고 책임자로 조선 혁명당을 이끌었다.

1932년 1월 상순에 이호원조선 혁명군 사령부 부관장(副官長, 또는 機要秘書)이 되어 활동하였으나 1932년 1월 19일 조선혁명당의 진로 및 항일무장 투쟁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 혁명군(朝鮮革命軍) 사령 김보안(金輔安), 부사령 장세용(張世勇) 등과 함께 흥경현(興京縣)에서 회의를 개최하던 중 일본 경찰 50명과 중국보안대 100여 명으로 구성된 토벌대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이호원은 김관웅(조선혁명군사령)·장세용(張世湧, 부사령)·이종건(李鍾建, 국민부공안국장)·이규성(李奎星, 경위대대장)·박치화(朴致化)·전운학(田雲學)·차용륙(車用陸)·김보안(金輔安)·이동산(李東山) 등 요인 10여 명과 함께 체포당했는데, 이를 신빈 사건(新賓事件)이라 한다. 이호원은 1932년 11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후 1939년 출옥하였다. 그러나 이호원은 1945년 일본통화 헌병대에 다시 체포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1945년 광복 후, 한교 연합회의 문화부장과 조선 혁명 동지회의 주석, 길림성 조선인 민주 연맹 주석을 겸임하였다. 또 연길시 제2중학교와 도문중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1951년부터는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과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이호원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호원은 연길시 제2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있으면서 연길 한글 연구회의 주임으로 선출되었으며, 조선족 자치주 부주장으로 있으면서는 연변 조선어문연구회 준비위원회의 주임위원을 담임하였다. 1957년에는 『연변일보』에서 조선어 순결화 문제에 관한 지상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이호원은 여기에서 주요인물로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이호원 판결문, 大正10年 刑上第142號」,(1921. 7. 9) (국가보훈처)
  • 강진영, 「이호원의 민족운동 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구』7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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