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崔翊龍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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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국민회 부관|북로사령부 참모부 서기|동흥학교 발기인 |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11월 29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몰년 시기/일시 | 1923년 7월 2일 |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성진(城津) |
| 거주|이주지 | 북간도 |
| 학교|수학지 | 경성 |
| 활동지 | 연길현 춘양현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함경북도 성진(城津) 출신이다.
최익룡은 국내와 만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인 오성 학교(五星學校)를 다녔으며 이후 1918년 보성 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천도교 중앙교회 강습소를 다녔으며 3·1 운동 이후에는 북간도로 망명하여 연길현 춘양향(春陽鄕)에 본부를 둔 대한 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 국민회에서는 군사 활동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따로 군사회를 두었는데 사령관 안무(安武), 제1중대장 조권식(曺權植), 제2중대장 임병극(林炳極), 향관 허동규(許東奎)·김석두(金石斗), 군무위원 이원(李園)·마룡하(馬龍河)·최기학(崔起鶴)·마천룡(馬天龍)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 중 최익룡은 안무의 부관으로 활동하면서, 박생렴(朴生廉)이 일본 밀정의 혐의가 있다고 하여 용정촌(龍井村) 북구(北溝)에서 5리쯤 떨어진 곳으로 끌고가서 육혈포로 총살하였다.
1920년 재간북대한의민회(在墾北大韓義民會)·재간대한국민회(在墾大韓國民會)가 연합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를 결성하였을 때, 최익룡은 참모부 서기로 활동하였다. 또한 용정동흥(東興)학교의 발기인 중 한명으로서 학교 설립에 기여하고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1922년 봄 최익룡은 함북 성진으로 밀파되어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 활동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독립운동 혐의로 함흥 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1923년 7월 2일 청진 형무소에 수감 중 탈옥하려다가 간수의 총에 맞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