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송

한자 朴吉松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반제동맹|중국 공산당 북만성 위원회 서기|동북 항일 연군 12지대장
출생 시기/일시 1917
수학 시기/일시 1925년
수학 시기/일시 1930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4월경
활동 시기/일시 1936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37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2월 30일
몰년 시기/일시 1943년 8월 12일
출생지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학교|수학지 왕청현(汪淸縣)
학교|수학지 왕청현
활동지 왕청현
활동지 왕청현
활동지 영안현
활동지 북안성 경성현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길송의 호는 주원(周元)이다. 1917년 왕청현 민가(民呵)의 빈농인 박덕과(朴德課)와 어머니 전씨(田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1943년 8월 12일 일제 당국의 사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본적은 함경북도 회령군이다.

활동 사항

박길송은 1925년 왕청현립 제5소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7년경 수해로 인하여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1929년에 졸업하였다. 재학 중 진보적 학생들의 조직인 ‘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왕청현 제3 소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으나 학비 부족으로 3개월 만에 중퇴하고, 이후 1930년 6월부터 1932년 6월까지 고향의 나루터에서 뱃사공으로 일했다.

이 때 동창생 박창수(朴昌洙)의 권유로 1932년 4월경 반제 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한 뒤 11월부터 중국 공산당 왕청현 위원회 아동국장이 되고, 이듬해인 1933년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서기로 활동하는 등 항일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3월에 박길송은 처 김옥순(金玉順)과 함께 북만주 영안현(寧安縣)에서 동북 항일 연합군 제5군 제1사(師)에 입대하였고, 같은 해 5월 경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동북 항일 연군 제5군 정치주임 등의 요직을 담당하면서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섰다.

193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7월 동북 항일 연군 제3군 제3사 조직과장이 되어 부금현(富錦縣) 일대에서 강력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9년 3월에는 동북 항일 연군 제3군 3사 7단 정치주임으로 전보되어 허형식(許亨植) 등과 함께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해 4월 중 적 ‘토벌대’와 싸우다가 부상당해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1940년 4월에는 항일연군 제3로군 제6지대 중국 공산당 북만성(北滿省) 위원회 서기겸 제17지대 정치지도원의 직책을 맡아 항일 투쟁 조직의 영도와 정치 및 사상이론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1년 6월부터 제3로군 12지대장의 중책을 맡아 대일항쟁을 주도하는 한편, 10월 경에는 북만주 지역의 농민 무장조직을 결성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반만주국(反滿洲國)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따른 어려운 생존조건으로 인해 19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에 걸쳐 만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동북 항일 연군이 쇠퇴하였다. 이에 1941년 초 북만성의 서기 겸 3로군 정치위원인 김책(金策)과 3로군 총지휘 장수전(張壽籛), 북만성위 위원 빙중운(憑仲雲)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열린 만주당 대표회의에 참석하게 되자 3로군은 참모장 허형식이 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기 최용건과 함께 북만에 남아있던 허형식은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휘하 부대를 여러 소부대롤 나누어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1941년 10월 소련에 갔던 김책이 3로군 사령부 소재지로 돌아온 후 김책은 활동의 곤란을 고려하여 6·9·12지대원의 대부분인 160여 명을 소련으로 보내고 허형식으로 하여금 12지대장 박길송과 장서린이 지휘하는 두 지대를 거느리고 대중조직 사업과 유격전을 벌이도록 하였다. 허형식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박길송은 1942년 8월 3일 만주국군 토벌대에 의하여 전사하였고, 그가 가지고 있던 서류가 발견되어 이들과 연계되어 있던 지하조직도 발각되었다.

허형식이 전사하기 2일 전에는 동북 항일 연군 지도부와 소련극동군은 1942년 8월 초 잔존 동북 항일 연군 대원들을 소련적군 제88특별여단(일명 동북 항일 연군 교도려)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북만주에서의 투쟁을 중단하고 소련으로 들어올 것을 명령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북만주 지방을 무대로 완강하게 항일 무장 투쟁을 지속하였다. 박길송은 1942년 12월 30일 북만주의 북안성(北安省)경성현(慶城縣)에서 만주국 경찰대와 교전하다 부상을 당했고, 요양 중이던 1943년 1월 4일 일본인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같은 해 8월 12일 일제 당국에 의해 사형 집행 당하였다.

묘소

평양의 혁명 열사능에 안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30(朝鮮 6) (みすず書房, 1976)
  • 와다 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작과 비평사, 1992)
  • 박창욱 주편, 『조선족혁명렬사전』 3 (遼寧民族出版社, 1992)
  •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 6·3동지회 지음, 성대경 옮김,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역사비평사, 2000)
  • 장세윤, 「허형식연구 : 동북 항일 연군내 주요 한인지도자의 항일투쟁 사례검토」(『한국독립운동사연구』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 장세윤, 「허형식, 북만주 최후의 항일투쟁가 : “백마타고 오는 초인”」(『내일을 여는 역사』27, 내일을 여는 역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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