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元大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의열단|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원|조선의용군제3대 제2분대장 |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12월 29일 |
| 수학 시기/일시 | 유년기 |
| 수학 시기/일시 | 1922년 5월 ~1928년 |
| 수학 시기/일시 | 1928년 |
| 수학 시기/일시 | 1933년 |
| 수학 시기/일시 | 1934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6월 17일 |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 출생지 | 경상북도 신령군(新寧郡) 지곡면(知谷面) 오산동 139번지 |
| 거주|이주지 | 중국상해 |
| 학교|수학지 | 경상북도 영천군 |
| 학교|수학지 | 경상북도 영천군 자천리 |
| 학교|수학지 | 경상북도 영천읍 |
| 학교|수학지 | 남경 |
| 학교|수학지 | 낙양 |
| 활동지 | 남경 |
| 활동지 | 한구 |
| 활동지 | 한구 |
| 활동지 | 연안 |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무장 투쟁과 통일 전선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원대는 조선의열단, 조선의용대에서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원대는 1911년 12월 29일 경상북도 신령군(新寧郡) 지곡면(知谷面) 오산동 139번지에서 이중호(李重鎬)의 5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원대는 이명(異名)으로 마덕산(馬德山)·공문덕(孔文德)을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고향의 운산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이후 1921년 인근 마을인 안천리에 소재한 백학서원에 백학학원이 설립되자 신학문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하였고 1922년 5월 보다 가까운 자천리에 자천보통학교가 설립되자 입학하여 학문을 배웠다.
이원대는 1927년 12월초 결혼하였고 1928년 학교졸업 후 당시 영천지역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인 영천농업보습학교에 입학하여 1년 과정을 마치고 1929년 돌아왔다.
이원대는 4년 동안 가족들에게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1933년 6월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국내공작원 안병철(安炳喆)의 알선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원대는 1933년 남경(南京)조선 의열단 간부학교(幹部學校)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1934년 3월에는 중국 군관 학교(中國軍官學校) 낙양 분교(洛陽分校)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5년 낙양 군관 학교를 졸업한 후 이원대는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지를 왕래하면서 지하공작을 펴다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중국 경찰에 협조하여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숙청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이원대는 남경(南京)에서 결성된 민족 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1937년 12월 1일 강서서 성자현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특별훈련반 제4중대에 입교하여 훈련을 마친 뒤 김홍일(金弘壹)장군의 인솔 하에 조선민족전선연맹 본부가 있는 한구(漢口)에 도착하여 전략적 요충 지대인 무한삼진(武漢三鎭)을 수호하는 데 필요한 선전공작과 간첩체포, 포로심문, 시설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1월에는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고 10월에는 조선의용대 제1구대에 편성되어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와 함께 대적선무공작(對敵宣撫工作), 섬멸작전, 밀정, 숙청 등 작전업무에 종사하였다.
이원대는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제3대의 제2분대장으로 임명되어 분대원을 지휘하며 팔로군 태항군구 제6분구의 사하, 형태, 무안 등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43년초 김석계와 함께 석가장에서 조선 의용군 대원 모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북경 일본군 헌병대로 압송되어 김석계와 함께 군사정탐죄로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3년 6월 17일 일본군 헌병대 본부 후원에서 14명의 저격수에 의하여 총살되었다.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