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玄益哲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통의부 위원장|국민부 중앙 집행 위원|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193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출생지 | 평안북도 박천 |
| 거주|이주지 | 요령성 관전현 |
| 활동지 | 평안북도 박천 |
| 활동지 | 관전현 향호구 |
| 활동지 | 봉천성 환인현 |
| 활동지 | 길림 |
| 활동지 | #REF! |
| 활동지 | 남경 |
| 활동지 | 남경 |
| 묘소 | 장사 인근 악록산 |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활동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현익철은 평안북도 박천 출신이다.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후 만주로 망명했다. 1920년 관전현 향호구에서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했다. 이때 일제 앞잡이와 밀정 숙청에 진력했다. 1921년 현익철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 동안 복역하고 다시 만주 이동했다.
현익철은 1924년 대한 통의부에 참여,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길림에서 고려 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했다. 1927년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고, 중앙 집행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29년 국민부 내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을 조직했다. 1930년 조선 혁명당 간부들이 일본군에 의해 잡혀 죽거나 체포되자, 현익철은 시 당 조직을 개선하고 중앙책임비서가 되어 당 업무를 총괄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런가운데 1931년 봉천(奉天)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재차 만주로 탈출했다.
현익철은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대륙침략 전쟁을 일으키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 항일전선을 재정비했다. 이는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등의 3개 단체와 하와이·멕시코 등지에서 조직된 6개 한인단체와 연계된 조직을 결성했던 것이다.
1938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군무부 산하에 군사학편수위원회(軍事學編修委員會) 위원으로 활동하던 현익철은 민족운동단체의 회합을 위해 김구(金九)·이청천(李靑天)·유동열(柳東說) 등과 호남성 장사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일제와 내통한 박창세(朴昌世)일파인 이운환(李雲煥)에게 저격당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사건이 장사 사변(長沙事變, 남목청 사건)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장을 치루고 장사 인근 악록산에 묻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