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韓炳基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 독립단 단원 |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8월 31일 |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 출생지 | 미상 |
| 거주|이주지 | 만주 집안현 |
| 활동지 | 유하현 삼원보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한병기는 1919년 3·1 운동이후 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5일 국내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적 저항인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대한 독립단에서 결성되었다. 한병기는 대한 독립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중 1919년 8월 평북 위원(渭原) 강계 대안(對岸)인 집안현(輯安縣) 주재 일제 경찰 40여 명이 중국 군병 20여 명을 동원하여 양군(兩郡) 인접지역인 집안현 온화보(蘊和堡)에 사는 농민과 산포수(山砲手) 400명을 포위 수색할 때 함께 포위당하였다. 당시 독립단 총지단(獨立團總支團) 총무 박문용(朴文瑢), 독립운동가 박운석(朴云錫), 70세 노인 4명 등과 함께 강변 나무숲에서 사살당하여 순국하였다. 그러나 10여 일이 지나도 시신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