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崔碩淳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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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평안북도 삭주 3.1 운동 주도|대한 통의부 의용군 중대장|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 중대장|총독 사이토 저격사건주도|국내진공작전 |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5월 |
| 몰년 시기/일시 | 1925년 2월 |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 출생지 | 평안북도 삭주 |
| 거주|이주지 | 집안현 서취보 |
| 활동지 | 평안북도 삭주 |
| 활동지 |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환인현 대아하 |
| 활동지 | 만주 집안현 |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최석순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출생지나 유년기, 청년기의 행적을 알 수 없다. 일제측 자료에는 1892년 6월 17일 출생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동생 최준석(崔錫俊)이 1891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기록 역시 정확하지 않다.
최석순은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서 호는 백순(白淳)이다. 최석순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유년기나 청년기의 행적을 알 수는 없으나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삭주 지역의 3·1 운동에서 크게 활동한 것으로 보아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최석순의 동생 준석이 3·1 운동 직후 만주 집안현(輯安縣) 서취보(西聚堡) 화전자(花甸子)에서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이 무렵 만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최석순은 1919년 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박장호(朴長浩), 조맹선(趙孟善), 백삼규(白三圭), 조병준(趙秉準), 전덕원(全德元), 박양섭(朴陽燮) 등이 조직한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해 집서(輯西) 지단장(支團長)에 선임되었다. 이어 1922년 8월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각 단체들이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고, 군사 조직으로 대한 통의부 의용군(大韓統義府義勇軍)을 편성하였을 때 환인현(桓仁縣) 대아하(大雅河)에 군영을 두고 활동한 제2중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제2중대는 대한독립단의 중요 임원들이 급진적인 독립전쟁론을 주장하는 청년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로서 많을 때는 600∼700명에 달하였다. 제2중대는 1923년 12월 초순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초산군과 벽동군에 진입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는 등 국내 진입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대한 통의부에서 공화(共和)와 복벽(復辟)이라는 이념과 항일전술에 대한 차이로 분기가 일어나자 1923년 6월 대한 통의부와 관계를 끊고 새로운 군단(軍團)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협력을 얻어 1923년 8월 그 명칭을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 이하 참의부)라 하였다. 최석순은 참의부에 참여하여 창설 당시 제2중대장에 임명되었고, 1924년 부서개편 때는 참의장(參義長)에 선임되었다. 최석순은 기독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대하였던 참의부에 참여했기 때문에 복벽을 주장하던 세력과는 지향점이 달리 민주 공화제를 지향했다고 판단된다.
참의부는 1924년 5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조선 총독이 압록강을 순시하고 있을 때 부대를 투입하여 그를 공격하였다. 이 사이토 총독에 대한 저격사건에는 최석순이 지휘하던 제2중대가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제2중대 제1소대 2분대장인 김창화와 부대원 7명이 평북 후창군 우항령에서 일본 경찰과 접전하여 1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후창군 성천면 내동의 영림창을 습격하여 소각하는 전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에 자극된 일제는 랴오닝 성(遼寧省) 당국자와 외교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자신들의 경찰을 동원하여 독립군 공격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최석순은 제2중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초산 등에 침투하여 일제 경찰서 파괴 및 밀정을 처단하는 등 수차례에 걸쳐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25년 2월 집안현 고마령(古馬嶺)에서 육군주만참의부 간부들이 모여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한 군정회의(軍政會議)를 개최하던 중 초산경찰서에서 출동한 일제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 이에 소대장 최항신(崔恒信) 등과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육탄전을 벌이는 등 4시간 남짓 동안 결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회의에 참여한 2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는 남만주지역 독립군 항전사에서 최대의 참변으로 알려져 있다. 동생 최준석도 독립군과 연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의주경찰서에서 악형(惡刑)으로 순국하였다.
1995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