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수

한자 朱鎭壽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만흥학교설립|신민회강원지부|경학사|신흥강습소|정의부|고려 혁명당 중앙위원
출생 시기/일시 1875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활동 시기/일시 1926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이후
몰년 시기/일시 1936년
추모 시기/일시 1991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1년
출생지 강원도 울진(蔚珍)
거주|이주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哥家)
활동지 강원도 울진
활동지 강원도
활동지 경성
활동지 유하현 삼원보
활동지 유하현
활동지 길림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1911년 105인 사건에 관련된 이후 시종일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활동 사항

강원도 울진(蔚珍) 출신이다. 울진군 원남면(遠南面)에 만흥 학교(晩興學校)를 설립하여 지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을 했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의 구성원으로 강원도 책임자로 임명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1910년 8월에는 김구, 양기탁 등과 서울에 조선총독부에 대립하는 도독부를 설치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주진수는 간도 이민계획의 실현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했던 안명근(安明根)사건에도 관련되었다.

출옥 이후 가족을 이끌고 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哥家)에 정착했다. 여기에서 주진수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고, 동시에 신흥 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데 참가해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섰다.

1919년 9월 신참(新站), 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선전, 선동활동에 나섰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전영화(田榮化), 니콜리스크 정부로부터 파견된 황만영(黃萬榮), 신참지방의 윤인보(尹仁甫), 신상무(申相武), 안기완(安基完), 이순(李舜) 등과 주진수는 미국 차관 3백만불(弗)의 도입 문제와 순회강연 계획 등을 논의했다. 당시 주진수는 니콜리스크 정부의 미국인 고문의 말을 인용, "일본인을 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국을 적으로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은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호응을 받지 못했고 연단에서 쫓겨났다.

1926년 정의부(正義府)에서 적극 활동했다. 주진수는 유일당(唯一黨) 촉성에 참여하기 위해 이규풍(李圭豊), 최소수(崔素水)와 함께 소련에서 길림(吉林)으로 돌았다. 이후 정의부, 천도교, 형평사(衡平社) 등의 구성원이 중심되었던 고려 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했다. 주진수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고려 혁명당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차이로 분열되자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상훈과 추모

1991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조선총독부 경무국, 1934)
  • 『독립운동사』2, 3, 5 10 (국가보훈처)
  • 『독립운동사자료집』9, 10, 11, 14 (국가보훈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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