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世永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의병,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자 |
| 대표경력 | 신흥 무관학교 교장|무오 독립선언 가담|한교공회 발족|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대한 통의부 군사부장 |
| 출생 시기/일시 | 1869년 5월 29일 |
| 수학 시기/일시 | 1889년 |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 활동 시기/일시 | 189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2월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출생지 | 충청남도 청양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충청남도 홍주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충청전라경상도 |
| 활동지 | 충청남도 정산군 관현리 |
| 활동지 | 통화현 합니하 |
| 활동지 | 길림 |
| 활동지 | 길림성 환인현 마권자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북경 |
| 활동지 | 중경 |
| 묘소 | 중국 사천성 |
한말의 의병장이자 일제 강점기에 상해와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세영은 양헌수(梁憲洙)에게 한학을 수학한 뒤, 1889년(고종 26) 육영공원에 입학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이봉학(李鳳學)과 향리에서 유회(儒會)를 설립, 스스로 약장(約長)이 되어 지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세영은 1895년 을미사변에 격분하여 홍주에서 이설(李偰) 등과 함께 관찰사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승우(李勝宇)의 간계로 패퇴하여 홍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듬해에 황재현·이관·김홍제 등과 남포에서 재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군주사(軍主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97년 대한제국 군대의 육군 참위(參尉), 1899년 부위(副尉), 1902년 정위(正尉)·헌병대장 서리를 지냈다. 1903년 이후 나라가 기울어감을 개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세영은 1906년에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함락시키는 등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패하여 공주진위대병에 체포된 뒤, 같은 해 11월 23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종신 유배의 형을 언도받고 황해도 황주로 유배되었다. 1907년 10월에 철도(鐵島)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나 형이 중지되어 풀려났다.
이세영은 유배에서 풀려난 직후 독립 의군부(獨立義軍府)충청·전라·경상 3도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08년 동생 이창영(李昌永)과 성명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대한협회 은산지회(殷山支會)를 조직, 항일활동을 하였다.
1913년 3월에 이세영은 함경·평안·황해도의 독립의군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13년 5월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독립군 양성과 후진 교육을 위해 설립된 신흥 강습소의 소장 서리에 취임하였다. 1917년 6월에는 신흥 강습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 신흥 강습소가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됨에 따라 교장으로 취임하여 조국 광복의 핵심 인물인 청년 군관의 양성에 더욱 주력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에서 여준(呂準)·정안립(鄭安立)·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3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무오 독립 선언서를 서명, 발표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환인현에 거주하던 이세영은 손극장(孫克章)·독고욱(獨孤旭)·독고환(獨孤煥) 등과 함께 근처의 청년들을 모집하여 독립운동 단체인 한교공회(韓僑公會)를 발족시켰다. 한교공회의 본부는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 두고 부근 각처에 지부를 설치하여 일본의 침략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일본에 아첨하는 친일파들을 적발, 숙청하는 등 격렬한 항일 투쟁 활동을 전개하여 남만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19년 4월 16일에는 13도 대표에 의해 조직되었던 한성 임시정부에서 이세영을 참모부차장에 임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상해의 통합 임시정부에서 다시 노동부차장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1920년 5월 3일 서로 군정서에서는 신흥학교를 개편하여 정식 사관학교로 개교식을 가졌는데 이세영은 계속해서 교장직을 맡아 독립군 중견간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1년 주만통군부(駐滿統軍府) 사령관이 되었고, 1922년 2월 광한단, 한족회, 독립단, 대한 국민단, 대한 청년 연합회 등이 통합하여 관전현(寬甸懸)에서 민족단일의 독립단체를 지향하여 대한 통군부(統軍府)가 조직되자 채상덕(蔡尙悳)을 총장으로 추대하고 이세영은 군사부장이 되었다.
일본군의 만주 출병후 남북 만주에서의 무장 단체 연합회로서 발족한 통군부가 동년 8월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병행한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었을 때도 이세영은 군사위원으로 또는 참모부장으로 계속 무장항일투쟁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청년계층과 유림계층과의 알력으로 독립운동 선상에 분규가 일어나자 이세영은 북경으로 가 버렸다. 그러자 그와 20여 년간을 동고동락하던 전덕원(全德元)은 통의부의 부활을 주장하여 그를 다시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1923년 12월에 군사부문을 확대하여 진용을 강화하게 되자 이세영은 통의부의 군사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이세영은 환인현에서 손극장(孫克章)·독고욱(獨孤旭) 등과 함께 한교공회를 조직하여 구국활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의 추격을 피하여 다시 북경으로 건너갔다.
1925년 5월 31일에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나자 이세영은 북경에서 이를 규탄하는 교정서를 작성하여 연병호(延秉昊), 박숭병(朴崇秉) 등과 같이 서명 배포하였다. 1930년 2월에는 북경에서 조성환(曺成煥)·손일민(孫逸民) 등과 한족 동맹회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 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중경으로 옮겨 신사회(新社會) 부위원장, 요·길·흑민중후원회(遼吉黑民衆後援會) 간사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을 하다가 1938년 2월 사천성 성도에서 영면하였다.
중국사천성에 안장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