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東求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천도교 계열의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고려혁명위원회 국내조직부장|조선형평사 의장|고려 혁명당 책임비서 |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10월 28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7월 14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3~192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3년 10월 7일 |
| 추모 시기/일시 | 2001년 |
| 출생지 | 강원도 횡성 |
| 거주|이주지 | 만주 길림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길림성 |
일제 강점기 국내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이동구는 1922년 7월 14일 서울 재동에서 조직된 고려 혁명 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의 국내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3년 이동구는 조선 형평사(朝鮮衡平社)가 창립되자 가입했고, 조선형평사의 내부 분열 때 혁신동맹계(革新同盟系)로 활동했다. 다음 해 8월 개최된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 임시대회에서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25년 4월 조선형평사 전국대회에서 이동구는 임시의장,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전주의 전라북도 형평사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6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의 체결로 만주의 독립운동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이동구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최동희, 정이형 등과 함께 만주의 정의부원, 국내의 천도교도와 형평사원 등을 규합하여 고려 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고자 했다. 이어서 1925년 8월 중국장춘(長春)에서 고려 혁명당 설립에 대해 논의하고, 조선형평사와 천도교연합회(天道敎聯合會)를 중심으로 당원을 모집하는 임무를 띠고 국내로 귀국했다.
이동구는 1926년 3월 천도교연합회의 김봉국, 송헌 등에게 고려 혁명당 조직 계획을 통보했다. 동시에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에서 오성환(吳成煥)을 가입시켰다. 그리고 국내 천도교계와 형평사 간부들을 중심으로 당원을 확대해 갔다.
1926년 4월 5일 이동구는 고려 혁명당을 창당하면서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 이전인 3월 이동락과 함께 당원들의 위임장을 갖고 중국길림성(吉林省)에 가서, 최동희, 양기탁, 고활신, 현정경 등과 고려 혁명당의 선언, 강령, 당규 등을 논의했다. 같은 달 29일 고려 혁명당으로 당명을 정했다.
1926년 12월 고려 혁명당의 주요 문서를 소지했던 중앙 집행 위원 이동락의 체포를 계기로 당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시작하자, 이동구는 정이형 등과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추진했다. 이동구는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중 1927년 3월 하얼빈 전가전(傳家甸)의 농업공사(農業公司)에서 정이형, 유공삼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동구는 하얼빈 총영사관 경찰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1927년 12월 제1회 공판에서 경어 사용을 요구했고, 신문에 대해 거부 투쟁으로 일관했다. 이동구는 징역 7년을 언도 받았으나, 여기에 불복하고 공소했다. 1928년 10월 평양 복심 법원(平壤覆審法院)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治安維持法違反)으로 징역 5년을 받고 4년 7개월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1933년 출옥 후 동지였던 유공삼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