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尹德甫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 독립 군비단 총단장|광정단 단장|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정의부 |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1월 1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 출생지 | 함경남도 흥원 |
| 거주|이주지 | 만주 장백현 |
| 활동지 | 함경남도 흥원 |
| 활동지 | 장백현 |
| 활동지 | 장백현 |
| 활동지 | 장백현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길림성 유하현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를 우려해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 독립 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동단의 재무 부장, 장백현 16도구(道溝) 신창동(新昌洞)의 통신 사무국 국장 대리, 총단장(總團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7월에는 태극단(太極團)·대진단(大震團)·흥업지단(興業支團)·광복지단(光復支團) 대표들과 군사·외교·행정·교육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1921년 10월 흥업단(興業團) 등 주변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 국민단(大韓國民團)을 조직하였고, 윤덕보는 총무로 선임되었다. 10월 20일 각 단체들의 발기로 장백현에서 독립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농민회를 조직할 때 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2년 1월에는 장덕진과 이탁(李鐸)을 체포하려는 일경의 밀정이 파견되었다는 정보에 따라 임시정부에서는 윤덕보(尹德甫)에게 밀정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한다. 1922년 8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운동이 전개되어 통의부(統義府)가 조직될 무렵 국민단을 광정단(匡正團)으로 개편하고 총무장(總務長)과 단장(團長)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 대표 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임시 정부를 부인하고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각지의 독립운동가로 새롭게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러시아 공산당을 모범으로 하여 위원제 중심의 중앙기관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 해 6월 창조파가 조직한 한국 국민 위원회(韓國國民委員會)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國務領)인 이상룡(李相龍)에 의해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국민 대표 회의가 실패로 끝난 1923년 11월부터 길림(吉林)에서 신숙(申肅) 등 창조파의 대표자들과 함께 만주에 있는 각 단체의 통일을 협의하고, 정의부(正義府)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 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 행정 위원으로 이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정의부 조직을 완료하였는데, 이 때 윤덕보도 중앙 행정 위원으로 일하였다.
정의부에서 중앙 행정 위원장(中央行政委員長)과 외교 위원장으로 만주의 동변도(東邊道)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0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국무원(國務員)에 선임되고, 그 후 정의부의 중앙 행정 위원장·외교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 8월에는 정의부 특별위원으로 길림성(吉林省)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