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尹琦燮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자 |
| 대표경력 | 임시정부 군무차장|신흥 무관 학교 교장|국회의원 |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4월 4일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193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56년 |
| 몰년 시기/일시 | 1959년 2월 27일 |
| 추모 시기/일시 | 1989년 |
| 출생지 | 경기도 장단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평양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1908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청년 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1911년 봄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 학감이 되었다가 교장이 되어 독립군 병사 훈련을 지도하였다.
그 후 간도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이광(李光) 등과 군관 양성을 위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를 설치하여 이후 신흥학교의 교사로 10여 년간 재직하였다.
1912년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부민단의 대표로 임시 정부에 파견되었다. 1920년 상해에서 육군 무관 학교(陸軍武官學校) 교관과, 임시 정부 군무부(臨時政府軍務部), 임시편집 위원장(臨時編輯委員長), 상해 거류민단(上海居留民團) 본구역의 위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듬해 8월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과 임시 정부국무원의 군무차장(軍務次長)을 지냈으며, 1921년 5월 중한 국민 호조사 총사(中韓國民互助社總社)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7월에는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협성회(協成會)에 가입하였으며, 우리말 사용의 장려를 위한 연설회와 강연회를 통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1921년 11월 임시 의정원 의원 25명과 연서로 독립 청원을 태평양 회의(太平洋會議)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발송하였다.
1923년 5월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상해에서 조직된 협성회(協成會)의 단장으로 단원 150명과 임시정부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1924년 2월 임시 의정원 의장으로 피선되어 독립운동의 추진책을 강구하였고, 1926년 12월에는 임시 정부의 국무원(國務員)에 선임되어 1935년까지 군무장(軍務長)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3월 한국의 독립을 위한 혁명을 완수한다는 목적으로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한국 혁명당(韓國革命黨)의 대표로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4년 2월 한국 혁명당 대표로 민족 단체의 합류를 추진하여 1935년 7월에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였고, 1936년 2월에는 민족 혁명당의 당보부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3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며, 194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학 편찬 위원 부주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 임정 요인 2진으로 귀국하였으며 이후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 조선 민족 혁명당 중앙 집행 위원으로서 당 기관지인 『앞길』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2월 15일 좌익 세력의 연합체로 결성된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의장단의 부의장 및 상임위원을 역임하고 1946년 12월에 결성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에 조선 민족 혁명당 대표로 관선 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1대 제헌 국회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1948년에는 국학 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직 중,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안재홍(安在鴻)·엄항섭(嚴恒燮)·오하영(吳夏榮) 등 납북 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 집행 위원에 선임되었다. 1959년 중경파 숙청시 반혁명분자 혐의로 구속되어 그 해 2월말에 병사하였다.
1924년 『보병조전(步兵操典)』이라는 군사 교육서를 발간하였다.
현재 북한평양의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