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

한자 梁起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언론인
성별 남자
대표경력 대한매일신보|신흥무관학교|동아일보|정의부|고려 혁명당|한국광복전선
출생 시기/일시 1871년 4월 2일
활동 시기/일시 1896년
활동 시기/일시 1898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활동 시기/일시 1904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07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26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37년
몰년 시기/일시 1938년 4월 20일
추모 시기/일시 1962년
관련사건 시기/일시 1911년 9월
특기사항 시기/일시 1916년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
활동지 한성
활동지 한성
활동지 유하현 삼원보
활동지 경성
활동지 유하현
활동지 길림
활동지 상해
활동지 상해
묘소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정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개설

양기탁은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으로 초명은 의종(宜鍾). 호는 우강(雩岡)이다. 양기탁(梁起鐸)은 1897년 독립 협회에 가입하여 구국 계몽 운동에 뛰어들었고 개혁당에 참가했다. 1904년 대한 제국시기, 국한문으로 『대한 매일 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 주필(主筆)이 되어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다. 미국 의회 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 진정서를 제출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신민회(新民會)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전국적인 국권 회복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933년 10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고 1935년 10월까지 재임하였다.

활동 사항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 간부로 적극적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될 때에는 한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선교사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었다.

1902년에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개혁당(改革黨)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4년에 일제가 러·일 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내정에 간섭하면서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보안회(輔安會) 운동에 참가했고, 보안회가 해산 당하자 이상설·이준 등과 함께 그 후속단체인 대한 협동회(大韓協同會)의 지방부장을 책임을 맡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7월에 영국인 베델과 합작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사장은 영국인 베델이 맡고, 총무를 양기탁이 맡았으나, 실제로는 양기탁이 신문사를 총 지휘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공식적으로 사장이 외국인(베델)이었으므로 일제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활용하여 양기탁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고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구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즉각 전재하고, 영문판 『Korea Daily News』에도 영어로 번역 게재해서 세계에 알리었다. 특히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에서의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여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7년 1월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지지하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개설하여 그 총무를 맡았다.

1907년 4월에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최광옥(崔光玉)·노백린(盧伯麟)·조성환(曺成煥) 등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를 창립하여 총 감독을 맡았다. 신민회의 본부를 대한매일신보사 안에 두고 전국적으로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을 지도하고 지휘하였다.

일제의 병탄이 가까워 오자 1909년 봄에 그의 집에서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개최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최고전략으로서 독립 전쟁 전략(獨立戰爭戰略)을 채택함과 동시에 그의 실천을 위하여 만주에 무관 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고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하여 1910년 8월에는 자신이 직접 독립군기지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만주를 답사했다.

1910년 12월에는 이동녕·이회영 등을 출발시키어 독립군 기지의 하나인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제는 독립군 기지 창건운동과 국권 회복 운동을 탄압하고, 신민회를 해체하기 위하여 1911년 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또한 1911년 9월에는 신민회가 일제 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다는 소위 「데라우찌 총독 암살 음모 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이때 양기탁에는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양기탁 등은 완강한 공판 투쟁을 전개하여 항소심에서 징역 6년을 확정 받고,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1916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에 노력하다가 중국천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되어서 2년간의 유배(거주 제한)에 처해졌다.

1920년 4월에 『동아 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되자 언론계의 원로로서 유근(柳根)과 함께 그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미국의원단이 서울에 오자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독립요청서를 제출하여 다시 일제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복역 중 어머니 인동 장씨의 별세로 일시 가출옥된 것을 이용하여 거듭 망명을 결행해서 만주로 갔다.

1923년에 편강렬(片康烈)·남정(南正)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였다. 의성단은 봉천(奉天)의 만철(滿鐵) 병원을 습격하는 등 장춘선(長春線) 일대에서 활약한 용감한 독립군 단체였다.

1925년 1월에는 김동삼(金東三) 등 동기들과 함께 의성단, 길림주민회, 광정단(匡正團), 대한군정서 등을 통합하여 독립군단체로서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의 대표로서 소련에서 돌아 온 주진수(朱鎭洙), 천도교 혁신파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金鳳國),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 등 다수의 동지들과 고려 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양기탁은 임시정부의 국무령 또는 주석으로 몇 차례 추대되었으나, 거절해 오다가 1933년 10월에 국무령(국무위원)에 취임하여 1935년 10월까지 2년간 임시정부의 대표로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한국 국민당 및 한국 독립당과 연합하여 한국 광복 전선(韓國光復戰線)을 결성하였다. 1938년 중국강소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고당암(古堂庵)에서 병으로 서거했다.

저술 및 작품

1895년 최초의 한영사전인 『한영자전 韓英字典』(선교사 J. S. 게일, 한국 이름은 奇一)을 편찬 지원하였다.

묘소

1993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분묘 발굴 조사단이 투입되어, 중국장쑤성에 매장된 양기탁의 묘소를 확인한 뒤, 순국선열 봉영 때 유해를 봉환하여 동작동 국립 묘지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혈사(獨立血史)』 2·3 합본(대한문화정보사, 1956)
  • 김후경,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광복출판사, 1983)
  • 이강훈 편저, 『독립운동대사전(獨立運動大事典)』(대한민국광복회후원, 1985)
  • 김필자, 『양기탁(梁起鐸)의 민족운동(民族運動)』(지구문화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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