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蔡燦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서로 군정서 중대장|육군주만참의부 참의장 |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대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충청북도 충주 |
| 거주|이주지 | 남만주 |
| 학교|수학지 | 통화현 합니하 |
| 활동지 | 충주 |
| 활동지 | 통화현 합니하 |
| 활동지 |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집안현 통화현 |
| 활동지 | 만주 집안현 |
일제 강점기 국내와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채찬은 충청북도 충주 출신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905년 을사조약에 강제로 체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年)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채찬은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졸업하였으며, 신용관(申容寬) 등과 함께 백서 농장(白西農場)을 만들고 경영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채찬은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의병대를 조직하여 그 중대장으로 국내외에서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채찬은 1920년 5월 평안북도 강계(江界)의 문옥면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7월 평안북도 후창(厚昌)의 친일군수 계응규(桂膺奎)를 사살하였다. 1921년에는 요동성(遼寧省) 관전현(寬甸縣) 일대에 침입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또 통화·관전·유하(柳河)·임강(臨江) 등지에서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일민단(日民團)·강립단(强立團) 등을 공격, 소탕하였다.
1922년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통군부가 조직되고, 대한통의부로 확대·개편할 때에 채찬은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가담하였으며, 제1중대장으로 집안현통화현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대한 통의부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고 의군부가 분립되자 김원상(金元常)·박응백(朴應伯)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의용군 제1·2·3·5중대와 유격대·독립소대를 분립시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를 조직해 참의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압록강 철교 준공식 때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습격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살되었다.
1962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