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奎豊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의용군|한성정부 평정관|고려 혁명당 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3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 |
| 거주|이주지 | 연해주, 만주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만주 길림 |
일제 강점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규풍은 1865년에 충남 아산(牙山)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강만국(姜晩菊) 등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용군을 조직해, 함경북도 회령과 경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파하였다. 1919년 4월 23일, 한성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3월에 이규풍은 길림(吉林)에서 열리는 민족혁신파 대표자대회에 노령 지역의 대표로 주진수(朱鎭洙)·최소수(崔素水)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1926년 최소수(崔素水)·주진수(朱鎭壽) 등과 길림(吉林)에서 개최된 민족혁신파 대표대회에 노령대표로 참가하여 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오동진(吳東振)·곽종대(郭鍾大), 천도교의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헌(宋憲) 등과 함께 고려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이규풍은 고활신·김봉국·오동진·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고려 혁명당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고려 혁명당은 내부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대립이 점차 심화되었으며, 분열을 조장하는 일제의 간계가 끊이지 않았다. 또 간부 14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당의 기능이 마비되자 이규풍은 주진수 등과 함께 다시 노령으로 돌아가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