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元植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안동 3.1 운동주도|서로 군정서|정의부 중앙 집행 위원|농민호조사설립|길림전만선반제동맹대회 집행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8월 28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활동 시기/일시 | 183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 |
| 거주|이주지 | 중국 봉천성 |
| 활동지 | 경상북도 안동 |
| 활동지 | 유하현 삼원보 |
| 활동지 | 북경 |
| 활동지 | 길림성 유하현 |
| 활동지 | 길림현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길림 |
| 활동지 | 남경(난징) |
일제 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원식은 188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김원식은 1919년 안동지역에서 3·1 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해 중국봉천성(奉天省)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김원식은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동포의 원호(援護)에 전력을 다했다. 1921년 서로 군정서의 이상룡(李相龍) 독판(督辨) 지시로 국내에 잠입하여 전국 각지에 연락,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김원식은 1922년 서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단·광복군 총영(光復軍總營)·보합단(普合團)·광한단(光韓團)·벽창 의용대(碧昌義勇隊)·평북 독판부(平北督辦府) 등이 대한 통군부로 통합할 때 협력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동북 군사 연락 위원(東北軍事連絡委員)에 임명되어 북경(北京)에 주재하면서 60여 명의 학생을 남경(南京) 등지로 유학시켰다.
이후 통의부(統義府)·참의부(參議府)·군정서(軍政署)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할 때 김원식은 김동삼(金東三)·김상덕(金相德)·오동진(吳東振)·이규사(李圭四)·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중앙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7년 재만(在滿) 한인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농민 호조사(農民互助社)를 발기·설립하였다. 1928년에는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삼부(三府) 합작을 위해 정의부 대표로 김동삼(金東三)과 함께 진력하였다. 1929년 상해로 이동하여, 국내의 광주 학생 운동을 지지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상해 한인 청년 동맹을 조직하였다. 1930년에는 길림전만선 반제동맹대회(吉林全滿鮮反帝同盟大會)의 집행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1년 만주 사변 후 김원식은 동북군사위원(東北軍事委員)으로 활동하던 중,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간도형무소에서 2년간 예심 끝에 국내에서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1933년 한국독립당군 대표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윤기섭(尹琦燮) 등과 난징에서 신한 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이후 길림성 강동촌(江東村)에서 독살당했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