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承學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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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 독립단 대표|독립 신문사 사장|임시정부 학무부총장 |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7월 12일 |
| 수학 시기/일시 | 1905년(광무 9)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 몰년 시기/일시 | 1964년 12월 17일 |
| 출생지 | 평안북도 의주 |
| 거주|이주지 | 만주 봉천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학교|수학지 | 만주 봉천 |
| 활동지 | 중국상해 |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활동했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1904년 8월 한성 고등 사범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1907년(융희 1) 정미조약(丁未條約) 체결 때 서울 종로에서 반대하는 연설을 하다가 체포되어 평리원(平理院) 구치감에서 3개월 동안 복역했다.
1910년 10월 만주로 건너가 봉천 강무당(奉天講武堂)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의병운동에 가담하였다.
1911년 봉천 강무당을 졸업했다. 1919년 음력 3월 15일 각계 각층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할 때 이에 참여하였다. 8월 임시정부 평북 독판부(平北督辦府)와 대한 독립단의 국내 특파원으로 백의범(白義範)·백기준(白基俊)과 같이 국내에 들어와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였고 88개소에 독립단 지단(支團)을 설치 운영하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는 민국 독립단(民國獨立團)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2월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 사령부 군기국장으로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였다.
1920년에는 임정 직할의 광복군사령부의 군정(軍政) 겸 군기국장으로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이 되어 민족 정기를 확립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울러 독립신문사의 부대 사업으로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부설하고, 박은식(朴殷植), 조완구(趙琬九), 윤기섭(尹琦燮), 김두봉(金枓奉), 정신(鄭信), 차리석(車利錫), 백기준(白基俊) 등과 함께 교과서 편찬 사업도 벌였다.
1922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취임하여 양국 간의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임시 의정원의 평안도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 성립을 위하여 이유필(李裕弼)과 함께 남만에 파견되어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임정의 학무부 차장이 되어 학무부 총장의 직무를 대행하였다.
1926년 10월 육군 주만 참의부 제4대 참의장으로 임명되었고, 1927년 3월 참의부 소재지인 서간도 환인현에 도착하여 남만 독립군 단체(정의부·참의부·신민주)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1928년 길림(吉林)에서 열린 정의부·신민부·참의부 3부 통일 대표 회의에 참의부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과 군민의회(軍民議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중일 군경 합동대에게 잡혀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5년 3개월 복역 후 출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귀국하여 독립운동사 편찬작업을 추진했다. 1945년말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성수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평북도민회장, 독립 신문사 사장,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부위원장, 한국 독립당 감찰위원장 등을 지냈다. 8·15 광복 이후 친일파 명단 작성과, 정부수립 직후 건국 유공자 심사를 주관하였다.
저서로는 『한국 독립사(韓國獨立史)』가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묘소가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