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錫河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만주·노령지방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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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정의부 군민 대표회 위원 제5중대장|조선 혁명당 중앙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92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9월 |
| 몰년 시기/일시 | 미상 |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 출생지 | 평안북도 의주(義州) |
| 거주|이주지 | 만주 봉천성 |
| 활동지 | 만주 봉천성 |
| 활동지 | 길림성 유하현 |
| 활동지 | 길림성 |
일제 강점기 만주·노령지방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석하는 평안북도 의주(義州)사람이다.
김석하는 석하(錫夏), 석하(石夏)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1922년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여 유격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길림(吉林)에서 정의부(正義府)의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 위원과 제5중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김석하는 정이형(鄭伊衡)과 함께 평안북도에 있는 경찰서와 주재소 5개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6명을 사살하고 2명을 중상시킨 후에 전리품을 가지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1927년 7월 정의부원 홍학순(洪學淳)·장기천(張基千)·이근수(李根秀) 등과 함께 의주군(義州郡)가산면(加山面)방산동(方山洞)으로 출동하여 강영화(姜榮化)·계승호(桂承浩)등의 밀정을 체포하여 총살하였으며, 24일에는 이진무(李振武)를 국내로 파견하여 구성(龜城) 경찰서 조악(造岳) 경찰주재소를 습격, 일본 경찰 중위호(重爲好)를 사살케 하였다.
김석하는 혁명 정부로서 국민부를 지지하는 유일당(唯一黨)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9년 9월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여 23명의 중앙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김석하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