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鄭淳萬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해조신문』·『대동공보』 주필|안중근의거지원 |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3월 3일 |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189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몰년 시기/일시 | 1911년 |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
| 출생지 |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연길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길림성 연길현 용정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
일제 강점기 국내와 간도 및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순만은 1873년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정석종(鄭錫鍾)이고, 어머니는 밀양(密陽) 박(朴)씨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유수공파(留守公派)이다.
정순만의 장남 정양필은 190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1913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시의 한인소년병학교를 졸업하였고,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총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수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하였다.
정순만은 1896년 4월 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의 도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회에 입회하여 활동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반대투쟁이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나자 ‘을사오적’ 암살계획을 주도하였다.
1906년 정순만은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연길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민족 교육 기관인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이 계획되자, 연해주로 가서 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海潮新聞)』 창간에 참여한 정순만은 주간·주필·총무로 활동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하얼빈 공립 협회에 참여하고 대한인 국민회 지회장에 피선되는 등 미주 한인사회와 연계를 맺었다. 정순만은 1908년 11월에 창간된 『대동공보(大東共報)』에서 윤필봉·미하일로프 등과 함께 주필을 맡았다.
한편 1908년 5월에는 안중근과 함께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서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의 병행을 표방한 비밀결사인 동의회(同義會)가 결성되자, 정순만은 이에 가담하였다. 안중근의 하얼빈의거 후에는 안중근 변호에 힘썼다.
그런 가운데 1910년 정순만이 오발 사고로 블라디보스토크 민회장 양성춘을 쏴 죽이는 불상사가 발생해 그 대가로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민족운동의 재기를 도모하다가 양성춘의 형과 미망인에게 처참한 복수를 당하고 말았다.
1986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