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張志暎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구비 전승·언어·문학/언어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국어 학자|언론인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연세 대학교 교수|조선 어학회 제6대 이사장|이화 여자 대학교 교수 |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
| 수학 시기/일시 | 1903년 4월-1906년 6월 |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7월-1911년 6월 |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9월-1911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7월-1912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9월-1914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경 |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경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10월-1931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9월-1958년 3월 |
| 몰년 시기/일시 | 1976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42년 10월-1944년 10월 |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본관은 인동(仁同),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호는 열운(洌雲)으로 교육자로서 활동했다.
어려서 집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3년 4월 관립 한성 외국어 학교(漢城外國語學校) 한어과(漢語科)에 입학하여 공부했고, 1906년 6월 졸업했다. 이후 모교에서 부교관으로 근무했다.
1908년 7월부터 1911년 6월 동안 국어학자 주시경 밑에서 국어학을 연구했다, 1908년 9월 사립으로 설립된 수리 전문 학교인 정리사(精理舍)에 입학하여, 1911년 3월 졸업했다. 이후에는 오산 학교(五山學校), 상동 청년 학원(尙洞靑年學院), 경신 중학교(儆新中學校)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1년 7월부터 1912년 5월까지 오산 학교에서부터 후진 양성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특히 상동 청년 학원에서는 1912년 9월부터 1914년 8월까지 학감이면서 국어와 수학을 담당했고, 경신 중학교에서도 교무 주임이면서, 국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 그는 교사 생활을 하면서 1912년경에는 유지들과 ‘물산 장려회’를 조직, 무명을 손수 짜서 옷을 지어 입는 운동을 벌였다. 특히 1913년경에는 청년 비밀 결사대인 ‘흰얼모[白英社]’를 조직,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을 외각에서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2월 28일 그는 조규수, 김정섭, 신경우, 노대규 등과 자신의 집에 모여 고종 황제의 승하 내막을 폭로하여 국민들의 의분을 제고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당시 조선 일보 정치부장이었던 조규수가 국민 대회 포고문을 작성하여 서울 시내에 붙였다. 그리고 1920년 대동단(大同團) 당수 전협(全協)의 부탁으로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모셔가서 왕정을 세우려는 계획과 관련하여 국민에게 알리는 문건을 기초했다. 1921년 12월에는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했다.
1926년 10월부터 1931년 7월 동안에는 조선 일보 기자로, 지방부장, 문화부장, 편집인으로 근무했다. 1927년 1월 신간회(新幹會) 조직에 가담하여 조사부 간사로 활동했다. 특히 『조선 일보』 지면에 신간회 란을 만들어 각 지방의 활동 상황을 소개했다.
이후 그는 각종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조선 총독부 언문 철자법 심의 위원,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 양정 중학교(養正中學校) 교사, 조선어학회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그는 수형 생활을 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 경찰서와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그는 동지 30여 명과 함께 홍원 경찰서에 갇혀 고문과 심문을 받고, 1년 만에 함흥 형무소로 갔다. 이후 1944년 10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함흥에 거주 제한을 당해 3년 만에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경성 헌병대에 잡혔다가 풀려났다. 이후 양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부국장, 조선어학회 제6대 이사장, 서울 대학교 강사,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 소장을 지냈다. 그리고 1948년 9월 연희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이후 주로 대학 교수로 근무했다. 1958년 3월 연세 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했다.
주요 저서를 간행 연도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어전』(유인본, 1924)
『조선어 철자법 강좌』(활문사, 1930)
『국어입문』(한글사, 1946)
『옛글』(정음사, 1946)
『향가』(유인본, 1955)
『중국어』(정음사, 1957)
『홍길동·심청전』(정음사, 1964)
『이두 사전』(정음사, 1976)
교육자로서 다양한 수상을 했는데, 문교부 장관, 서울시 교육회장, 그리고 대통령으로부터 공로 표창과 훈장을 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