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朴一秉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종교 청년회 회장|3.1만세운동가담|조선고학생동우회 회장|동아일보 기자|조선청년회|조선교육회 이사|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노동사(勞動社)|신흥청년동맹|신사상연구회조선 공산당|정우회(正友會)검사위원|제2차 조선 공산당 검거 사건|조선 공산당재건운동 |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
| 수학 시기/일시 | 1907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3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6월 |
| 추모 시기/일시 | 2007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온성 |
| 학교|수학지 |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 |
| 학교|수학지 | 경성 |
| 학교|수학지 | 일본동경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일본동경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일제 강점기 일본과 국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박일병은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뒤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동경에서 동우회 회장, 유일 조선인 구락부 위원으로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동아 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 노선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각종 단체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년 2월 김찬(金燦)·윤덕병·백광흠(白光欽) 등과 함께 신흥 청년 동맹(新興靑年同盟)을 조직하였다. 4월에는 조선 청년 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 박일병은 홍명희(洪命憙)·홍증식(洪增植)·구연흠(具然欽)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인 신사상 연구회(新思想硏究會 : 이후에 火曜會로 개칭)를 결성하였다. 1925년 8월에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6년 4월 화요회·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 등의 통합단체인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6월 제2차 조선 공산당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출감된 후에는 1925년 12월부터 개시된 제1∼4차의 조선 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와해된 당 재건에 전력을 기울였다.
박일병은 1907년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에 설립된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마친 뒤 1913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역사와 철학을 공부하였다.
3.1 운동 당시에 박일병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년 1월 김찬(金燦)·송봉우(宋奉禹) 등과 함께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듬해 귀국하여 『동아 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6월 장덕수(張德秀) 등과 조선청년회의 발기인으로 활약하였으며 민족주의 노선을 택하였다. 대종교청년회 회장, 민립대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 교육회 이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1년 11월에 박일병은 경기도 고양에서 소작인대회에서 소작인에 대한 지주의 악습 폐기, 소작료 이외에 받는 것을 교정할 것, 소작료는 생산량의 40%만 납부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박일병은 1922년 1월 윤덕병(尹德炳)·신백우(申伯雨)·이준태(李準泰) 등과 함께 무산자 동맹(無産者同盟)에 참여하였다. 동년 12월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한 후 집행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 노동자 계몽을 위한 노동사(勞動社)를 결성하고 기관지 『노동자』를 발행하였다. 그해 8월에 김종범(金鍾範)·정운해(鄭雲海)와 함께 평양에서 평양 양말 직공 조합 동맹 파업 사건을 지지하고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1924년 2월 김찬(金燦)·윤덕병·백광흠(白光欽) 등과 함께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4월에는 조선 청년 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7월 홍명희(洪命憙)·홍증식(洪增植)·구연흠(具然欽)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인 신사상 연구회(新思想硏究會 : 이후에 火曜會로 개칭)를 결성하였다. 1925년 4월 화요회·북풍회(北風會)·조선 노동당·무산자동맹회는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고 합동 상무위원을 뽑아 이를 공동 운영하였는데, 이 때 박일병은 김찬·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회를 대표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8월에 조선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6년 4월 화요회·북풍회(北風會)·조선 노동당·무산자동맹 등의 통합단체인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여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6월 제2차 조선 공산당 검거 사건 때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시력을 거의 잃어 병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이후에는 1925년 12월부터 개시된 제1∼4차의 조선 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와해된 당 재건에 전력을 기울였다.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