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義順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교육자|독립운동가 |
|---|---|
| 성별 | 여 |
| 대표경력 | 명동학교 교사|명동 여학교|삼일 여학교 교사|상해 한인 애국 부인회 회장|적십자회|상해 여자 청년회 창립대회 주비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 출생지 | 함경남도 단천(端川)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국자가 |
| 활동지 | 길림성 화룡현 |
| 활동지 |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
| 활동지 | 길림성 화룡현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일제 강점기 명동 여학교 및 삼일 여학교 교사, 상해 애국 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의순은 만주(滿洲)의 민족학교인 명동학교(明東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정신태·우봉운 등과 함께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신한촌(新韓村)삼일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또한 상해 애국 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의순은 1902년경 부친 이동휘가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으로 활동하게 되자 할아버지 이발(李發), 언니 인순(仁橓) 등과 함께 7세의 나이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1911년에는 부친을 따라 만주(滿洲)로 건너가 쥐쯔제[局子街]에 정착한 뒤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 있는 민족학교인 명동학교(明東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의순은 교사로서 정신태·우봉운 등과 함께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이후 근방의 마을에 야학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한편, 부흥 사경회(復興査經會)도 개최하였다. 1919년에는 명동 여학교를 병설해 길림성 간도 지역 여성들의 민족교육에 주력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의순은 1918년 가을에 부친의 지시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신한촌(新韓村)삼일 여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애국지사 채성하(蔡聖河)의 장녀 채계복(蔡啓福)과 함께 상해 한인 애국 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남성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독립운동 분위기를 조성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의 양성을 위하여 적십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부친이 상해[上海]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자 조부 이발(李發)과 함께 상해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오영선과 결혼하였다. 이후 부친 이동휘가 임시정부와 결별한 뒤에도 계속 상해에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의순은 1930년 8월 11일 인성 학교(仁成學校) 교장 김두봉(金枓奉)의 처 조봉원(趙奉元) 등과 함께 기존의 여성단체 조직인 상해 한인 부인회를 개조하여 보다 급진적인 조직인 상해 한인 여성 동맹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상해 지역 여성 조직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하여 김구(金九)의 중재 하에 상해 여자 청년회를 조직,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