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한자 李承熙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학자|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위정척사운동|을사오적처단상소|국채보상운동|연해주 독립운동기지건설운동
출생 시기/일시 1847년 2월 19일(음)
활동 시기/일시 1867년
활동 시기/일시 1880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활동 시기/일시 1913년
몰년 시기/일시 1916년 2월 27일
추모 시기/일시 1963년
추모 시기/일시 1977년
출생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거주|이주지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활동지 경상북도 성주
활동지 경상북도 성주
활동지 경상북도 성주
활동지 길림성 봉밀산
활동지 안동현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정의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국내 및 만주, 연해주에서 활동한 성리학자, 독립운동가.

개설

유교적 가풍에서 성장한 이승희는 위정척사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하였으나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애국 계몽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국권 피탈 이후 연해주로 망명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활동을 하였다.

가계

이승희(李承熙)는 1847년(헌종 13) 2월 19일(음) 경상도 성주 대포리(지금의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 1동)에서 저명한 유학자인 아버지 이진상(李震相)과 어머니 흥양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계도(啓道)이고, 호(號)는 강재(剛齋), 대계(大溪)이다. 1909년 겨울부터 호를 다시 한계(韓溪)로 고쳤고, 이름은 대하(大夏)로 고쳤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활동 사항

이승희의 집안은 대대로 주희(朱熹)와 이황(李滉)의 이학(理學)을 계승한 집안이었다. 지금도 그의 생가에는 대대로 이학을 계승해 왔다는 의미로 주리세가(主理世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승희는 5살 때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이후 가학(家學)을 이어 받았다.

이승희는 1867년 21세 때 흥선대원군에게 성학(聖學), 호적(戶籍), 전제(田制), 선거(選擧), 제병(制兵) 등 폐정 개혁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고, 1880년 말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황쭌센(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고종에게 바치자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지어 자신의 시국 인식을 표현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리자 이승희는 곽종석(郭鍾錫), 장완상(張完相), 강구상(姜龜相), 이두훈(李斗勳) 등과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는 포고문을 작성하여 각국 공관에 보내었다. 그리고 1905년 8월 의진시사소(擬陳時事疏)를 지어 과감한 내정개혁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 해 겨울에 을사늑약이 이루어지자 11월 초에 소수(疏首)로서 수백 명의 유생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라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목 베고 을사늑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 또한 이승희는 주한 일본군 사령부에 일본의 배신과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 또한 이승희는 통감부를 설치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를 꾸짖는 편지를 썼다.

1907년에는 성주의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 회장이 되어 각지에 통문을 보내어 담배를 끊고 국채를 보상하여 국권을 되찾자고 호소하였다. 또한 1907년 5월 5일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4월에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편지를 보내어 일본의 침략 만행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1908년 이승희는 김창숙(金昌淑) 등 문인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고령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이승희이상설(李相卨), 안중근(安重根), 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승희는 동지들과 밤낮으로 독립운동의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매일 새벽에 일어나 북극성을 향하여 절하고 생오민(生吾民) 종오교(宗吾敎) 대오방(大吾邦)의 세 가지 큰 소원을 빌었다. 그런가 하면 선생은 만국대동의원사의(萬國大同議院私議)를 지어 만국평화회의의 실질적 성과를 꾀하고자 하였다.

이승희는 1908년 이수인(李洙仁)을 본국에 보내 국내 유지들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널리 모금하는 한편, 1909년에는 독립운동의 기지 건설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승희는 길림성봉밀산(蜂蜜山) 아래 수천리 황무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직접 그곳을 답사한 후 황무지를 매입하여 100여 가구를 집단 이주시켜 기름진 땅으로 개간하고 마을 이름을 한흥동(韓興洞)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 한민학교(韓民學校)라 하였다. 이승희는 이때부터 호를 한계(韓溪)로 고치고 이름도 대하(大夏)로 바꾸었다. 이곳에서 이승희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동삼성 시무사의를 지어 황무지 개간과 독립군의 병제 및 민족교육의 방향을 제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반을 닦았다.

이승희는 1912년 중국의 총통 원세개(袁世凱)에게 편지를 보내 서구의 정치 이론에 의거하여 정치를 하는 것보다는 요순공맹(堯舜孔孟)의 교(敎)를 통해 천하 만고의 대공화(大共和)를 이루어 안으로는 중화 만고의 맹주(盟主)가 되고 밖으로는 천하 만방의 전도(前導)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승희는 궁극적으로 국교(國敎)인 공교(孔敎)를 통해 중화의 생명을 구제하고 중화의 만세의 생업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손문(孫文)에게도 편지를 보내 서양이 선교(宣敎)와 무역(貿易)을 통해 다른 나라를 노예로 삼고 인종을 멸하고 있다고 하면서, 중화의 교(敎)를 진작시켜 광복의 공을 성취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승희는 1913년 밀산부에서 안동현으로 이주하여 동삼성 한인 공교회(東三省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 공교회(北京孔敎會)에 편지를 보내 그 지회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4년에는 박은식(朴殷植)과 편지로 독립사상 및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하여 언론기관의 설립과 국사교육에 대해 논의하였다.

1914년 겨울 이승희는 요동의 흥덕보(興德堡)에 다시 한인 집단거주지를 건설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기 위하여 우선 약 백여 호가 생계를 유지할만한 토지 280일경(日耕)을 매입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이주하려고 갔더니 얼었던 땅이 녹아 물바다가 되는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거처를 옮겼다. 1915년 선생은 서구의 자유이론과 공화제, 입헌제에 대응해 유교에 근거하여 세계에 통용되는 새로운 정치이론을 모색해 보고자 애썼다. 이승희는 이문치에게 답한 편지에서 종족주의(種族主義)를 비판하였다.

1916년 2월 27일 새벽 4시에 70세를 일기로 봉천성 북문 밖 일승잔(日昇棧)에서 세상을 떠난 이승희의 영구(靈柩)는 3월 28일에 중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4월 28일 유림장(儒林葬)으로 치러졌다.

저술 및 작품

『한계유고(韓溪遺稿)』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국, 1934)
  • 송상도, 『기려수필(騎驢隨筆)』(국사편찬위원회, 1955)
  •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국사편찬위원회, 1955)
  • 김승학,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독립문화사, 1965) 『독립운동사자료집』14 (국가보훈처, 1991)
  • 김창숙, 『심산유고(心山遺稿)』(국사편찬위원회 1973)
  • 이승희, 『한계유고(韓溪遺稿)』(국사편찬위원회, 1976~198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 『대한민국 독립유공 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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