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한자 金弘壹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군인|정치가
성별
대표경력 중국국민혁명군 청년군사령부 참모처장|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동북 보안사령장관부 한교사무처장|육군사관학교 교장|주중대사|국회의원
출생 시기/일시 1898년
수학 시기/일시 1916년
수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26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47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48년~
활동 시기/일시 1950년
활동 시기/일시 1951년
활동 시기/일시 1977년
몰년 시기/일시 1980년
추모 시기/일시 1950년
추모 시기/일시 1951년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평북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
거주|이주지 중국 상해 등
학교|수학지 평안북도 정주
학교|수학지 중국 귀주
활동지 간도
활동지 중국 광주
활동지 중국 남경
활동지 중국상해
활동지 중국 강릉
활동지 중국 남경
활동지 중국 중경
활동지 길림성 금주 등
활동지 서울
활동지 경기도
정의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 한국군 창설에 가담한 군인이자 정치가.

개설

김홍일의 본관은 김해이며, 초명은 홍일(弘日), 호는 일서(逸曙)이다. 별명은 최세평(崔世平),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등이다. 중국귀주의 육군 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한 후 무장 투쟁을 계획하였다. 이후 중국군에 참여하여 소장까지 진급하였다가 1945년에는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 사관 학교 교장을 맡아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정치가로도 활동했다.

활동 사항

김홍일은 1898년 김진건(金振健)의 3남으로 평북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에서 태어났다. 만주봉천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18세에 정주 오산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황해도신천 경신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오산동문회가 항일단체로 몰려 구금되었다가 1918년 9월 중국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초 김홍일은 중국귀주(貴州)의 육군 강무 학교(陸軍講武學校)에 입학하여 같은 해 12월 졸업하였다. 1921년 3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노백린의 지시로 상해를 떠나 만주로 건너가 10월 서간도 군비단(西間島軍備團)과 북간도국민회가 통합하여 조직된 대한 의용군사회의 참모가 되어 독립군의 훈련에 전념하는 한편 대독립군단을 조직할 계획을 세웠으나 소련군 당국의 약속 위반으로 실패하였다. 1926년 10월 중국국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참모, 대대장, 연대장, 오송요새사령부 부관장(吳淞要塞司令部副官長), 상해병공창 군기처 주임(上海兵工廠軍機處主任), 사단참모처 주임, 사단참모처장, 19집단군참모처장, 청년군사령부 참모처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민당의 북벌과 중일전쟁에 참전하였다. 1931년에는 남경(南京)에서 한국군인회에 가입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도와 이봉창의 사쿠라다몬[櫻田門] 의거와 윤봉길의 상해홍커우공원 의거 등에 폭탄을 제공하는 등 임정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32년 2월에는 한국 독립당에 입당하여 재정부장을 맡았고, 중국군 당국과 군관학교 특별반 설치를 협의하였다. 1937년 겨울에는 중국강릉중앙군관학교 교관으로 한인학생 100여 명을 훈련시켜 이들을 조선 의용대에 편성시켰다. 1944년에는 민족혁명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차장 겸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에 부임하여 한미합작으로 국내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김홍일은 중국 동북 보안사령장관부 고급 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만주 거주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1947년 5월 중국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에 임명되어 복무하다가 1948년 8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김홍일은 국군에 입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참모학교 교장,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육군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다가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특히 6·25전쟁 중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약 1주일간 저지하여 미국 지상군의 참전을 위한 시간을 획득하였으며,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 탈환작전에 이르기까지 전공을 세웠다.

김홍일은 그 후 정계에 투신하여 제1공화국 기간 동안 주중대사로 재직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육군사관학교 교장시절의 육사 8, 9기생들과의 인연으로 국가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추진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조국수호 국민협의회 대표 집행위원이 취임하여 박정희와 결별하고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1967년 서울 마포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 의장,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전국구), 신민당 총재대행, 신민당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하다가 1973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77년에는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國防 槪論』(高麗 書籍, 1949). 『大陸의 憤怒-老兵의 回想記』(文潮社, 1972).

상훈과 추모

충무 무공 훈장(1950), 태극 무공 훈장(1951), 건국 훈장 독립장(1962),

참고문헌
  • 김홍일, 『大陸의 憤怒-老兵의 回想記』(文潮社, 1972)
  •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편, 『韓國 獨立 運動 資料集 : 中國 人士 證言』(박영사, 1983)
  •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편, 『韓國獨立運動證言資料集』(박영사, 1986)
  • 엄기원, 『김홍일 : 무와 기백을 겸비한 독립운동가』(청화 출판사, 1987)
  • 「한국의 전쟁 영웅들」(육군본부, 1992)
  • 김홍일, 「윤의사의 폭탄과 나」(『나라 사랑』25, 외솔회, 1976)
  • 김종문, 「김홍일의 생애와 독립운동」(단국 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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