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윤

한자 吳成崙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사회주의 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의열단원|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제1로군 정치부주임|열하성 경무청 경위보
출생 시기/일시 미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5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23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29년 8월
활동 시기/일시 1930년~
활동 시기/일시 1935년
활동 시기/일시 1936년
활동 시기/일시 1938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몰년 시기/일시 1947년
출생지 함경북도 온성
거주|이주지 길림성 화룡현 월신사 걸만동으로 이주
학교|수학지 혼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
학교|수학지 소련모스크바
활동지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활동지 길림성 왕청현
활동지 길림성 왕청현
활동지 북경
활동지 상해
활동지 만주 영안현
활동지 중국 광동
활동지 중국상해
활동지 중국 광주
활동지 광동 해륙풍 소비에트
활동지 길림성 반석현
활동지 길림성 반석현
활동지 길림성 장백현 일대
활동지 무송현(撫松縣 ) 고륭둔(高隆屯)
활동지 열하성
활동지 북경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개설

오성윤은 대한 국민 의회 무장부대에서 활동하였고 의열단원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가계

오성윤은 함경북도 온성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오성윤의열단 단원으로 1907년 부모를 따라 중국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월신사(月新社)걸만동(傑滿洞)으로 이주하였다. 1911년 조선인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집안사정으로 1913년 중퇴하였다.

1915년 오성윤은 혼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의 북일 중학(北一中學) 내 소학부에 입학하여 3년 뒤인 1918년에 졸업하였으며 1919년 4월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 국민 의회의 무장부대 편성방침에 호응하여 군무부 산하 무장부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대한 국민 의회 무장부대가 호르바트 지휘하의 중동선(中東線) 철도수비대 산하에 배속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탈영하여 8월 왕청현(汪淸縣) 남봉오동(南鳳梧洞) 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오성윤은 1920년 3월 교사직을 퇴직하고 북봉오동에서 최진동이 지휘하던 조선 독립단 도독부에 입대하였다. 5월에는 북경으로 가서 김원봉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 무렵 영어보습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21년 1월 오성윤의열단 암살부에 배속되었으며,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 통치령 청원을 비난하는 탄핵 결의에 동참하였다. 1922년 3월 의열단원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를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일경에 체포되었지만, 5월에 상해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탈옥하여 6월 에 만주로 탈출했다.

만주로 간 오성윤은 1923년 공산주의 단체 적기단에 가입하여 간부가 되었고 이후 광주(廣州)를 거쳐 독일베를린에 유학하여 1년간 체류한 뒤 1924년 소련으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26년 4월 졸업하였고 12월 중국광동(廣東)황포군관학교의 러시아어 교관이 되었다.

1927년 9월 오성윤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10월 상해에서 한국 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된다. 같은 달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중앙 집행 위원을 겸임하여 12월 광주 봉기에 참여하여 국민당장발규 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오성윤은 1928년 1월 해륙풍(海陸風) 소비에트 지구로 들어가 중국 홍군(紅軍) 군사 지휘부 성원 및 당학교 교사가 되었고 해륙풍 소비에트가 붕괴되자 8월 홍콩을 거쳐 상해로 도피하였다.

1929년 8월 중국길림성 반석현(磐石縣)에 파견되어 재만주 조선공산주의자의 중공 가입을 주도하였고 1930년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 남만특위 선전부장, 1931년 8월 중공 반석중심현위 서기가 되었다. 같은 시기 중한인 농민 협회(中韓人農民協會), 반제동맹 책임자가 되었고 중국 공산당 중앙의 무장폭동 방침에 동조하지 않아 만주성 위원회로부터 우경 기회주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런 가운데 오성윤은 1935년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제2사 정치부 주임이 되었고 1936년 6월 남만지방의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 발기인으로서 조직 창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9월 동만특위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8년에는 동북 항일 연군 제1로군 정치부 주임 겸 군수처장, 중공 남만성위 선전부장겸 지방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1년 1월 일본군의 ‘동남부 치안숙정공작’ 당시 무송현(撫松縣) 고륭둔(高隆屯)에서 체포된 이후 변절하였다.

오성윤은 1942년 열하성 경무청 경위보가 되어 일본 경찰에 협력하였고 해방 이후 북경 근교 승덕(承德) 한교동맹(韓僑同盟) 위원장 겸 조선 독립 동맹승덕시 책임자가 되었지만 팔로군이 승덕시에 진주한 뒤 체포되었다. 이후 1947년 초 임서(林西)에서 사망 하였다.

참고문헌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 李命英,「東滿の風雲兒·吳成崙」(『アジア公論』3, アジア公論社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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