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枓奉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한글학자|정치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동청년단|조선광문회|광문사(光文社)『말모이』|조선물산장려계|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신대한신문 新大韓新聞≫|신한청년당|상해파 고려공산당|『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상해 교민단 학무위원장|인성학교 교장|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 연합회 상무집행위원|한국독립당|비서장·이사|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북조선독립동맹 중앙 집행 위원 겸 주석|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조선신민당|북조선노동당|김일성대학 총장|북조선인민회의 의장|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조국통일전선의장단 의장 |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3월 17일 |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3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
| 몰년 시기/일시 | 1969년 |
| 출생지 |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읍 동부리 |
| 거주|이주지 | 중국상해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 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 남경 |
| 활동지 | 중국 산서성 진동남 태행산 |
| 활동지 | 중국 산서성 진동남 태행산 |
| 활동지 | 중국 산서성 진동남 태행산 |
| 활동지 | 평양 |
| 활동지 | 평양 |
| 활동지 | 평양 |
| 활동지 | 평양 |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활동한 한글 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주시경의 제자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고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 의정원 의원을 지냈으며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으로 추대되어 해방 후 평양으로 귀환하었다. 이후 조선신민당 위원장, 김일성대학 총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 조국통일전선의장단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돈홍(金敦洪)의 장남이며 1889년 3월 17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알려진 김두백이며 해방 후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약수(金若水)와는 사촌지간이다.
김두봉의 호는 백연(白淵)이고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고향에서 일부지주들이 사재를 모아 세운 보명학교를 다니다가 1908년 서울로 올라가 기호학교(畿湖學校)를 졸업하였고 이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1913년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였고 1914년 배재학교를 중퇴하였다. 당시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하고 있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하여 소년잡지 ≪청춘≫을 편집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하였고,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宗敎)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글연구의 선구자인 주시경(周時經) 밑에서 한글 연구에 몰두하고 1916년 광문사(光文社)에서 발행한 『말모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1917년 28살에 결혼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시간강사로 일하였다. 이 시기 김두봉은 조선물산장려계(朝鮮物産獎勵契)에 가입하여 국산품 애용 등을 통한 경제자립운동을 펼쳤으나 이로 인해 교직을 떠나야 했다. 이후에도 한글강습소를 차려 한글을 가르치면서 반일애국사상의 주입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가 같은 해 4월 신의주를 거쳐 중국상해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기도 하였고 신채호(申采浩)가 주필로 있던 순한문신문인 ≪신대한신문 新大韓新聞≫의 편집을 맡아 일하다가, 신문발행이 16호로 중지되자 김규식(金奎植) 등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담하였다.
1920년에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한 상해파 고려 공산당(高麗共産黨) 활동에 참여하였고 공산주의를 표방한 『정보』의 주필로도 활동하며 의열단(義烈團)과도 관련을 맺었지만 주로 한인교육과 한글연구에 집중하였다.
1922년에는 『조선말본』을 보완한 『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출판하였다. 1923년에는 고려공산당 총무국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24년에는 상해 교민단의 학무위원장에 선출되어 교민자녀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 관계하는 한편,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1928년 11월 이후에는 인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27년 한국유일독립당(韓國唯一獨立黨)상해촉성회(上海促成會) 이사로 참여한 것을 필두로 11월 상해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 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의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창당된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에서 당의·당강 기초작업에 참여하고 비서장·이사 등의 직책을 맡았다. 또 기관지 『진광(震光)』 발행의 중심역할을 맡았으며 1932년 10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本戰線統一同盟)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중앙 집행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조선 민족 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7년 말 남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중경으로 옮겨갔으며 1940년 조선 민족 혁명당 중앙위원 겸 조선의용대 편집위원이 되었다. 1941년 1월 10일 조선의용대원을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항일군정대학 졸업생을 비롯한 한인 청년을 규합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를 결성하였다.
1942년 4월 태항산팔로군 근거지에 도착해서 4월 태항산 반소탕작전에 참여하였고 7월 태항산에서 개최된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창립대회에서 중앙 집행 위원 겸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1944년 4월 연안에서 조선혁명청년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45년 2월 이 학교를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개편하고 교장이 되었다.
1945년 12월 귀국하여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하였고 3월 조선 독립 동맹을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으로 개편,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8월에는 조선신민당이 북조선조선 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될 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김일성대학 총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 조국통일전선의장단 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3월 제1차 공산당대표자대회에서 반혁명 종파분자로 공격받아 축출되었다. 그 뒤 지방협동농장으로 전출되어 1969년 피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1922년에는 『조선말본』을 보완한 『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