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呂運亨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정치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동제사|신한 청년당|대한민국 임시정부|건국동맹|건국 준비위원회|조선 인민당|좌우 합작운동 |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4월 24일 |
| 수학 시기/일시 | 1900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1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193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8월 1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1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7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5월 |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7월 19일 |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 출생지 | 경기도 양평 |
| 거주|이주지 | 중국 남경, 상해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학교|수학지 | 평양 |
| 학교|수학지 | 중국 남경 |
| 활동지 | 경기도 양평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강릉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 북경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조선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서울 |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만주 및 국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서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이다. 아버지 여정현(呂鼎鉉)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1885년 4월 24일 출생하였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신학문을 익혀 배재학당(培材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우무학교(郵務學校) 등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 보상 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부친 탈상 이후 집안의 노비들을 과감히 해방시키는 등 봉건 유습의 타파에 앞장섰다. 그리고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 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10년에는 남궁억(南宮檍)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강릉초당의숙(草堂義塾)의 교사가 되어 민족 교육에 매진하였다.
1911년 여운형은 기독교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의 장로교 연합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국 여행 중 생각을 바꿔 1914년 중국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이 무렵 여운형은 1912년 상해에서 결성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상해로 이동하여 민족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1918년 상해 고려인 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는 한편 구미에 유학하려는 70여 명의 한국 학생들에게 유학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1918년 8월에는 신한 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총무간사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게 되자 김규식(金奎植)을 초빙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거족적인 민족 운동을 추진하였다.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에 파견하여 2·8 독립 선언을 전개하도록 하였으며, 국내에는 김철(金徹)·선우혁(鮮于爀) 등을 파견하여 국내 인사들과 접촉하게 하였고, 자기 자신은 간도·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진작시켰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3·1 운동을 촉발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3·1 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여운형은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1919년 11월에는 일본동경(東京)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한인 교민사업에도 관여하였고,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 교장이 되어 민족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1920년 여름 코민테른 위원인 보이친스키가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상해에서 한인 독립운동자 중 유력자회의를 개최하고자 할 때, 여운형은 김만겸을 통해 보이친스키와 회견을 하고,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1921년 김립(金立)의 노농 정부 자금 횡령사건이 발생하자 이동휘(李東輝)와 결별하고, 김만겸(金萬謙)이 주도한 이르쿠츠크파와 고려 공산당 상해지부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가하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 증진을 모색하였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 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상해로 돌아와서는 1922년 10월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백범(白凡)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 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노농병 양성과 군비 조달 등의 군사적 투쟁도 준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임시정부의 재편 문제가 부상하자, 여운형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여운형은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이후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에 관심을 쏟았다. 여운형은 중국 공산당원 구추백(瞿秋白)과 손문(孫文), 그리고 요페·카라한·보로딘 등 소련 고문단 등의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중국 국공합작 성립에 노력하는 한편 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역할과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그의 견해는 곧 국공 합작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당시 중·소 인사들에 의해 크게 환영받았고, 이로써 여운형은 중국국민당·중국 공산당과 소련 사이에서 연락 책무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즉 여운형은 중국 혁명의 완성을 한국 민족 혁명의 전제로 보았고, 또한 중국의 혁명론과 같은 방식에서 민족 혁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여운형은 국내 사회주의자들과도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5년 12월에 조선 공산당이 발각되면서 김찬(金燦)·김단야(金丹冶) 등이 상해로 망명해 오자, 이들과 함께 1926년 1월에 조선 공산당 임시상해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6년 1월 광둥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중국의 국민혁명이 약소민족의 해방과 직결된다는 연설을 했다. 또한 황포군관학교 교관 손두환의 주선으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의 자금 지원 및 한인 청년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 문제 등을 교섭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여운형은 1926년 2월에 임시의정원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상해파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1926년 2월에는 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무산운동과 민족운동과의 연합'을 표방하면서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광동에서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를 결합한 비밀결사 공청사(共靑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상해에서 안공근(安恭根)·조상섭(趙尙燮) 등과 한국 독립운동 촉진회를 결성하였다.
한편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여운형은 이를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 조선 공산당 임시상해부의 6·10 만세운동 계획 추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여운형은 상해를 중심으로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던 중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다가 영국 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이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1942년 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0년부터 1942년 사이에 여러 차례 동경을 방문하여 국제 정세를 파악한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독립운동과 국가 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여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농민동맹(農民同盟)·부인동맹 등을 조직하였으며, 연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제휴,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 건국 동맹 조직을 기반으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만들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되고서 수립된 조선 인민 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부주석(副主席)이 되었으며, 11월에 조선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 인민당(朝鮮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고,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曺晩植)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46년 2월 15일 조선 공산당·조선 인민당·남조선 신민당·민족 혁명당·조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국 농민조합 총연맹 등 좌익과 중도파를 망라한 29개의 단체들이 1946년 2월 15일 결성한 통일 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6년 7월 10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8월 조선 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였으며, 9월 조선 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고, 11월 사회 노동당(社會勞動黨)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나 남조선 노동당(南朝鮮勞動黨)과의 합동이 무산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한 여운형은 3월 신당 결성을 위한 준비 활동에 착수하여 5월 24일 근로 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여운형은 김규식·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 통일 전선 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결국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당하여 사망하였다.
2005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2008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