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학

한자 金永鶴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목사|서울 만세 시위 주도|애국단 철원군단|블라디보스토크 선교 및 독립운동
출생 시기/일시 1877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9월~
몰년 시기/일시 1933년 1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추모 시기/일시 1977년
추모 시기/일시 1990년
출생지 황해도 금천
거주|이주지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활동지 서울
활동지 경기도 철원
활동지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정의

일제 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한 개신교 목사이자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하여 6개월 형을 받은 후 철원 애국단 사건(鐵原愛國團事件)으로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복역 후 1922년 9월 러시아연해주 신한촌(新韓村)에서 애국사상의 고취 및 독립지사 지원 등의 활동을 하다가 소련 공산당의 활동 중지 요구에 불응하여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933년 1월 사망하기까지 연해주 신한촌에서 선교 활동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가계

김영학은 1877년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영학은 1917년 서울광희문 교회(光熙門敎會)와 수표 교회(水標敎會)에서 목사로 재직했다. 김영학은 목사로 있으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도들에게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김영학은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0월 철원에서 김영학은 김상덕(金相德)·신현구(申鉉九)·조종대(趙鍾大)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 철원군단(鐵原郡團)을 조직하고 이근옥(李根玉) 등의 청년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구국 활동을 위한 자금을 조달 하다가 1920년 3월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12월 경성 지방법원에서 다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김영학은 1922년 9월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 신한촌(新韓村)에서 선교와 독립투사 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9년 종교 활동을 허용하지 않는 소련 관헌에 체포되어 근 1년 간을 공갈, 협박 또는 회유책에 시달리며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럼에도 거절하자 당국은 1931년 3월 가장 악질적인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10년의 중노동을 선고하였다. 김영학은 형을 치르던 가운데 1933년 1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대통령 표창,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4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1972)
  • 『독립운동사 자료집』9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1975)
  • 『대한민국 독립 유공 인물록』 (국가 보훈처, 1997)
  • 『매일 신보』(19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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