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蔡永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만주·노령지방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조선 독립 기성회 결성, 대한 국민 혈성단 조직, 고려 혁명군단 참여 |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6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
| 출생지 | 서울 |
| 거주|이주지 | 중국 만주, 러시아연해주 |
| 활동지 | 길림성 용정 |
| 활동지 | 러시아연해주 우수리스크 |
| 활동지 | 러시아이르크츠크 |
| 활동지 | 러시아스보보드니 |
| 활동지 | 중국상해 |
일제 강점기 만주·노령 지역에서 무장 투쟁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채영은 서울 출신이다.
채영은 이명으로 채영(蔡英)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중국용정(龍井)에서 북간도 최대 규모의 3·1 운동 집회인 '조선 독립 축하회(朝鮮獨立祝賀會)'개최 이후 간민 교육회(墾民敎育會)와 간민회(墾民會) 활동을 통해 북간도 한인사회의 자치와 민족주의교육,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인물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조선 독립 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결성하였다.
조선독립기성회는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추대하기로 하면서 회의 명칭을 대한 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하였다. 당시 채영은 총부(總部)에 배속되어 무관학교(武官學校) 설비위원(設備委員)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만주 훈춘(琿春)에서 홍범도(洪範圖)·이용(李鏞)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 산하에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국내진공계획을 세웠다.
채영은 1920년 초 러시아연해주우수리스크 인접지역에서 강국모(姜國模)·한희진(韓熙鎭) 등과 대한 국민 혈성단(大韓國民血誠團)을 조직하고 중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3월 하마탕에서 북간도(北間島) 동부와 훈춘, 노령(露領)의 각 독립단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자, 홍범도·구춘선(具春先)·이범윤(李範允)·황병길(黃丙吉) 등과 참석하여 각 독립단의 통일문제를 논의하였다.
1921년 채영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한인연합부대인 고려 혁명군단(高麗革命軍團)에 참여하여 고려 혁명군 사관 학교(高麗革命軍士官學校)의 교관으로 활동하였고 1921년 6월 러시아흑룡주(黑龍州) 스보보드니에서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할 당시, 혈성단을 이끌고 대한 의용군(大韓義勇軍)에 참여하여 참모부원으로 러시아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1923년 중국상해(上海)에서 열린 국민 대표 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다. 또한 1924년 상해에서 국민 위원회(國民委員會)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러시아우스리스크연변의 이만에 돌아와 활동하다가 러시아와 중국 국경인 뽀그라니치나야 역에서 자객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2002년 정부에서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