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기중

한자 蔡基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풍기 광복단|대한 광복회 회원|군자금 모금|친일 지주 처단
출생 시기/일시 1873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13년
활동 시기/일시 1915년 7월
몰년 시기/일시 1921년
추모 시기/일시 1963년
출생지 경상북도 함창(咸昌)
활동지 경상북도 풍기
활동지 경상북도 대구
정의

일제 강점기 풍기와 대구 등 국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서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풍기 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 광복회를 결성, 활약하였다.

활동 사항

채기중은 1873년 7월 경상북도 함창(咸昌)에서 채헌락(蔡獻洛)과 곡부공씨(曲阜孔氏)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字)는 극오(極五), 호(號)는 소몽(素夢)이다.

1913년에 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함께 풍기에서 독립 군단체로서 의병 출신자의 집합체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수합하기 위하여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 광산에 잠입, 활동하였다.

광복단의 주요 인물들은 주요 인물은 채기중을 비롯해 유창순(庾昌淳)[천안]·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청양]·강순필(姜順必)[상주 또는 봉화]·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옥(金相玉)·정운홍(鄭雲洪)[괴산]·정진화(鄭鎭華)[예천] 등이었다. 대개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 출신이다. 이들은 강순필이 이강년(李康秊) 의진, 유창순·한훈이 민종식(閔宗植) 의진에서 활동하고, 유장렬이 후기 의병기에 전북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보아 광복단은 의병 운동 참가자들이 주도한 조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광복단을 조직하는 과정은 『양벽도공제안실기(梁碧濤公濟安實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광복단이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덕태 상회(尙德泰商會)를 경영하던 박상진(朴尙鎭)과 연락하면서 1915년 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 국권 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협의하여 1915년 7월에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채기중은 이 광복단과 대한 광복회의 조직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한 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 각지에 회원들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그는 경상도의 책임자였으며 전라도 조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대한 광복회의 주요 인물인 박상진(朴尙鎭), 우재룡(禹在龍), 이관구(李觀求), 양제안(梁濟安) 등은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기 이전부터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무장 투쟁론을 채택하고 군자금 모집과 군대 양성을 위한 활동을 전개 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를 위해 대한 광복회는 전국적으로 혁명 기지를 건설하고 적당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투쟁 방략과 비밀, 폭동, 암살, 명령 등 4대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 광복회는 이와 같은 투쟁 강령들을 실천해 옮기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조직을 갖추는 동시에 만주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만주 길림에 우재룡을 파견했고, 주진수(朱鎭洙), 손일민(孫一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해 만주 거점의 본부로 삼았다. 또한 이진룡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여 만주에 상주시켰다. 이진룡이 순국한 후에는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전국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과 의협 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거점들을 설치했다. 대한 광복회는 한만 요지(韓滿要地)와 북경, 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 광무소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는 강령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거점들은 곡물상이나 잡화점으로 위장한 상업 조직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상덕태 상회(尙德泰商會)와 영주의 대동 상점(大同商店)을 비롯해 대구, 영주, 삼척, 광주, 예산, 연기, 인천 등에 설치되었다. 이밖에도 만주에는 안동 여관(安東旅館), 삼달 양행(三達洋行), 상원 양행(尙元洋行) 등이 설치되고 운영되었다. 특히 영주의 대동 상점과 대구의 상덕태 상회는 대한 광복회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만주의 안동여관 역시 대한 광복회 회원들이 만주에서 활동할 당시 크게 활용되었다.

대한 광복회는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면서 전국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대한 광복회 지부는 경상도,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활동하였다. 선생은 당시 경상도 지부의 책임을 맡고 경상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대한 광복회의 회원 모집과 군자금 수집활동에 전념했다. 채기중은 끊임없이 대한 광복 회원을 모집해 대한 광복회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풍기 광복 단원으로서 대한 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한 인물들은 주로 채기중과의 인연으로 대한 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한 광복회는 각도 지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발전했는데 그 중 충청도 지부와 전라도 지부에서의 군자금 모집과 의협 투쟁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충청도 지부장인 김한종(金漢鍾)과 전라도 지부장인 이병호(李秉昊)를 대한 광복회에 가입시켰다.

채기중은 군자금 모금의 방법으로서 총사령인 박상진에게 전국 각지의 부호들에게 통고문을 보내 군자금을 모집할 것을 주장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를 위해 그는 경상도 일대의 자산가들에 대해 주소, 성명, 재산 등을 조사한 후 대한 광복회 명의로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통고문은 우재룡에 의해 중국안동에서 발송되었는데, 발송 대상자는 대부호로 국한하였고, 소자산가들에게는 국내에서 각 지부별로 고시문이나 경고문을 발송하였다.

그가 대한 광복회 경상도 지부의 책임자였으나 그의 활동 범위는 경상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선생은 전라도 지부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는데 전라도 지부에서의 군자금 모집도 그가 담당하였다. 그는 이병호가 조사한 전라도 지역의 자산가들에게도 경고문을 발송하고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

그러나 대한 광복회의 군자금 모집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자금은 부호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이들이 군자금 모집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통고문의 효력을 높이고 군자금 모집을 원활히 하기 위해 친일부호의 처단 등 의협 투쟁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의협 투쟁은 군자금 모집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 뿐만 아니라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친일 세력들에게 민족적 응징을 통해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북 칠곡의 친일지주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으며, 충청도 지부에서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여 친일 부호와 친일 관리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더욱이 그는 장승원 처단 사건에 직접 가담하였다. 장승원 처단은 그가 주도했으며 강순필(姜順必), 유창순(庾昌淳)이 함께 가담했다. 장승원 처단 이후에도 대한 광복회 충청도 지부에서 박용하를 처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대한 광복회의 활동에 의해 그는 박상진, 김한종, 김경태, 장두환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정부에서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채기중, 『소몽 의사 유고(素夢 義士 遺稿)』(채인식, 1977)
  • 김후경, 『대한민국 독립운동 공훈사』, (광복 출판사, 1983)
  • 『대한민국 독립 유공 인물록』,(국가 보훈처, 1997)
  • 김희주, 『대한 광복단의 민족 운동 연구』, (한국 학술 정보, 2006)
  • 조동걸, 「대한 광복회 연구」, (『한국사 연구』42, 1983)
  • 조동걸, 「대한 광복회의 결성과 선행 조직」,(『한국학 논총』4, 국민 대학교, 1984)
  • 김희주, 「일제하 채기중의 항일 투쟁과 그 성격」, (『동학 연구』17, 한국 동학 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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