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한자 趙素昻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정치가
성별
대표경력 박달학원교사|대동단결선언발표|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기초위원,국무위원|한국독립당창당|중경 임시정부 외무부장|비상국민회의의장|남북협상참가
출생 시기/일시 1887년 4월 10일
수학 시기/일시 1902년~1904년
수학 시기/일시 1904년 7월~
수학 시기/일시 1908년~1812년
활동 시기/일시 1906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활동 시기/일시 1913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활동 시기/일시 1918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29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활동 시기/일시 1940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50년 5월 30일
활동 시기/일시 1950년 6.25 전쟁
몰년 시기/일시 1958년 9월 10일
추모 시기/일시 1988년
출생지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월롱면
거주|이주지 중국 상해
학교|수학지 한성
학교|수학지 일본동경
학교|수학지 일본동경
활동지 일본동경
활동지 일본동경
활동지 일본동경
활동지 경성
활동지 중국상해
활동지 중국상해
활동지 길림
활동지 길림
활동지 중국상해
활동지 프랑스파리
활동지 중국상해
활동지 중국 남경
활동지 중국 중경
활동지 중국 중경
활동지 중국 중경
활동지 서울
활동지 평양
활동지 서울
활동지 서울
활동지 평양
묘소 평양시 신미리
정의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한국 독립당 창당에 관여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치가.

개설

조소앙은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헌법·의정원법(議政院法)의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거쳐 초대 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이후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조소앙은 외교특파원으로 파리에 가서 한국의 독립 승인 및 국제연맹에의 가맹을 요구하는 등의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삼균주의를 임시정부 차원에서 개진하였으며, 1934년에는 삼균주의를 토대로 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국강령’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채택하게 하였다. 조소앙은 1937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서 창당 선언에서 삼균주의를 다시 확립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반탁 투쟁을 주도하고 제2대 국회에 진출하였으나 6·25전쟁으로 강제 납북되었다.

가계

조소앙은 1887년 4월 10일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월롱면 출신이다. 부친 이화제(理化齊)조정규(趙禎奎), 모친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6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자는 경중(敬仲), 호는 소앙(素昻)이다.

활동 사항

조소앙은 1892년 6세부터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조부 조성룡(趙性龍)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02년 성균관에 최연소자로 입학하였다. 이 무렵 맏형 조용하(趙鏞夏)는 개화파가 되어 1896년 독립 협회를 지지하였는데, 아우인 조소앙에게 독립협회의 취지와 활동을 설명해 주었다. 조소앙은 형의 영향으로 개화와 서양 지식에 일찍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해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 음모를 막기 위하여 성균관에서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성토문을 만들어 항의하였다.

조소앙은 1904년 성균관을 수료하고 7월에 황실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부립 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06년 동경 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共修學會)를 조직하여 회보를 발간하면서 주필로 활동하였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를 계기로 도쿄 유학생들과 항일 운동을 적극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 해 명치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09년 동경에 있는 조선인의 각 단체를 통합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여 회지 『대한흥학회보』의 주필로서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 경술국치 때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여 국내의 윤치호(尹致昊)·김규식(金奎植) 등에게 전달하고 비상대회의 비밀소집을 도모하다 일제에 사전 발각되어 구금되었다. 1911년에는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때 함께 유학을 하던 안재홍(安在鴻)·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조만식(曺晩植) 등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조소앙은 1912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조소앙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 등과 박달 학원(博達學院)을 세워 청년 혁명가들을 육성하였다. 또한 중국혁명가 진과부(陳果夫)·황각(黃覺)과 함께 항일단체인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 대동단결의 정신적·종교적 통일을 목적으로 육성교(六聖敎)라는 구국 종교를 제창하였다.

조소앙은 1917년 7월에 상해에서 독립운동계의 국내외의 변화에 대응하여 ‘대동단결 선언(大同團結宣言)’을 기초하여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하고 각계 인사에게 발송하였다. 1918년에는 김좌진 등과 대한 독립 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고, 그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1919년 2월에는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기초하여, 김교헌·박찬익·이동녕·안창호·이시영·신규식 등과 함께 민족독립운동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하였다.

조소앙은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여기서 조소앙은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정립 및 임시정부의 대외홍보 전반에 걸쳐 주도적인 활동을 해 나갔다. 임시정부헌법·의정원법(議政院法)의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거쳐 초대 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이후 국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6월에는 외교특파원으로 파리에 가서 임정의 전권대사로 파견된 김규식과 합류하여 한국의 독립 승인 및 국제연맹에의 가맹을 요구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8월에는 스위스제네바에서 개최되는 국제사회당대회 준비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의 승인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36개 참가국들은 만장일치로 이를 통과시켰다. 이어 조소앙은 네덜란드로테르담에서 개최되는 그 대회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다시 ‘한국 독립 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하였는데, 10개 참가국가들은 이를 통과시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하였다. 1921년에는 국제 사회당 대표단으로 소련 각지를 시찰한 뒤 5월 북경(北京)에 와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만주리 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조소앙은 1922년 6월 임시정부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이 되고, 세계한인동맹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조소앙은 한·중 공동전선의 모색에 힘썼다. 1923년에는 김상옥을 의거케 하고, 김구·이동녕·조완구·김철 등과 1932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소앙은 1929년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안창호(安昌浩)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이때 조소앙은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한 정강·정책의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제창하였는데,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말한다.

조소앙은 한국독립당의 대외선전 및 임시정부의 이론전개와 외교문제를 도맡았다. 삼균주의가 임시정부 차원에서 처음 개진된 것은 1931년 4월부터이다. 조소앙은 삼균주의 이론체계를 정립한 임정의 ˂대외선언˃을 기초로 작성하여 재중독립운동자에게 배포하였다, 5월에는 남경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정부의 국민회의에 제출하였다. 삼균주의는 한국독립당과 임정의 정치이념으로 채택 수용되고, 그 체계가 정립되었다는 임정의 입장을 밝혔다. 1934년에는 삼균주의를 토대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채택하게 하였다.

1937년 조소앙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서 창당선언에서 삼균주의를 다시 확립하였다. 1942년에는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하여 김규식과 공동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한국 독립당 집행위원장, 1945년에는 충칭(重慶)임시정부외무부장을 맡았다. 그는 임정 외무부장으로서 ‘대일 선전 포고문(1941. 12. 9)’, ‘대독 선전 포고(1945. 3. 1)’ 등을 비롯한 많은 대외문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해방 이후 조소앙은 12월 1일 임시정부요인 2진으로 환국하였다. 조소앙은 1946년 비상 국민 회의를 조직하여 그 의장이 되었다. 비상 국민 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고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통합을 이룰 때 다시 조소앙은 의장에 선출되어 반탁 투쟁을 주도하였다. 또한 반탁 투쟁 위원회 부위원장과 삼균주의청년동맹 위원장으로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조소앙은 단독 정부 수립에도 반대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취임을 거부하였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에 다녀왔고, 12월 방응모(方應謨)·백홍균(白泓均)·조시원(趙時元) 등과 함께 사회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선임 되었다. 조소앙은 1950년 5월 30일에는 제2회 총선거에서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3만 4,000여 표로 전국최고득표자로 당선되어 제2대 국회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서울에서 강제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조소앙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으로 위임되었으나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8년 9월 10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발해경(渤海經)」(1922), 「한국문원(韓國文苑)」(1932), 「유방집(遺芳集)」(1933), 「화랑열전(花郞列傳)」(1933), 「대성원효전(大聖元曉傳)」(1933), 「이순신귀선지연구(李舜臣龜船之硏究)」(1934) 등이 있다.

묘소

1970년대 말 평양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삼균학회, 『素昻先生文集』(횃불사, 1979)
  • 『三均主義硏究論集』1∼18(삼균학회, 1983∼1998)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 현대사 인물연구』2(백산서당, 1999)
  •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 세계 : 육성교에서 삼균주의까지』(지영사, 2003)
  •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선인, 2003)
  • 신용하, 『한국근대지성사연구』(서울대출판부, 2005)
  • 강만길, 『증보판 한국민족운동사론』(서해문집, 2008)
  • 김기승, 「해방 후 조소앙의 국가건설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3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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