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尹奉吉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한인 애국단|상해 홍구 공원 폭탄 테러 |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6월 21일 |
| 수학 시기/일시 | 1918년 |
| 수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4월 29일 |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12월 19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충남 예산 |
| 거주|이주지 | 중국 다렌 ,칭다오, 상해 |
| 학교|수학지 | 충남 예산 |
| 학교|수학지 | 충남 예산 |
| 활동지 | 충남 예산 |
| 활동지 | 충남 예산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중국상해 |
| 묘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
일제 강점기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홍구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은 19세의 나이에 농촌 계몽 운동에 뛰어들어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 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백범김구를 만나 의열 투쟁을 하기로 결심하고 한인 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구 공원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는 의거 이후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독립운동 지원과 임시 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본명은 우의(禹儀)이다.
1918년 덕산(德山) 보통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 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배척하여 자퇴하고,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다. 1921년 사설 서당인 오치 서숙(烏致書塾)에 들어가 매곡(梅谷)성주록(成周錄)에게서 한학을 수학하며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하였다.
그는 오치 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안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당시 민족 운동의 기조적인 방향을 잘 제시하여 주었던 『개벽(開闢)』 등의 잡지와 『동아 일보(東亞日報)』 등의 신문을 읽고 민족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였다.
그는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 계몽·독서회 운동 등 농촌 사회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7년 그는 구매 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경제 자립을 추구하였다. 또한 독서회(讀書會)를 통해서 문맹 퇴치에 힘썼다. 그리고 그는 1927년 농민 계몽을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을 가르쳤다. 『농민독본』은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 정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1928년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주된 사업으로는 공공 구입의 구매 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 배척(日貨排斥), 생활 개선 등이 있다. 그해 2월 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그런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농촌 활동을 계속하였고, ‘월진회(月進會)'라는 농민 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농촌 자활 운동을 펴나갈 수 있었다.
또한 건강한 신체 위에서 농촌의 발전과 민족 독립 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암 체육회(修巖體育會)'를 조직하여 건실한 신체를 바탕으로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그는 농민의 단결과 민족 정신의 배양, 그리고 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 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농촌 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1930년 3월 6일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宣川)에서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45일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자 결의하였다. 그래서 그 해 12월에 다롄[大連]을 거쳐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 무대를 옮겨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마침내 1931년 5월 8일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랑스 조계[租界: 프랑스가 조차한 지역] 안에 있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머물렀다. 안공근의 집은 상해프랑스 조계 샤비루 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3층이었다.
그는 이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인 동포 실업인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중국 채품 공사에 취직하여 말총 모자 등을 만드는 직공으로 근무하였다. 또한 한인공우 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해서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상해 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기도 하였다.
1932년에는 상해의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 장사를 하며 일본군 관계의 정보를 탐지하던 중 박진의 소개로 임시 정부 국무 위원 겸 한인 교포 단장(韓人僑胞團長)인 백범(白凡)김구(金九)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김구는 임시 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의열 투쟁을 계획하여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으로 하여금 왜왕(倭王)을 폭사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윤봉길에게는 일제(日帝)에 대해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자극제가 되어 김구를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론하며 의열 투쟁을 준비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을 상해의 홍구 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에 있는 일본인들은 도시락과 물통, 입장권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는 보도를 상해 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에 보도하였다.
윤봉길은 이때를 틈타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 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함께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당시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폭탄을 준비하였다. 폭탄은 김구의 요청으로 중국상해 병공창(兵工廠) 창장 송식표가 기사(技師) 왕백수(王伯修)를 시켜 비밀리에 제조한 것이었다. 병공창의 병기 주임(兵器主任)이었던 김홍일(金弘壹)이 주선하여 김구-윤봉길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그는 의거 4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한인 애국단에 단원 자격으로 김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거사를 진행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27일과 28일에는 홍구 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특히 28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곳에 머물러 준비하는 축하식장의 팻말을 보고 도륙의 대상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과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설 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모두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4월 29일 일찍 한 교포 집에서 한인 애국단의 백범김구 단장과 함께 조반을 들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는 홍구 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새 시계를 김구 단장의 헌 것과 바꾸었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구에게 돌려주었다.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렀다. 당시 홍구 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다. 중앙의 식단(式壇)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 m의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 그 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식단 위에는 표적물인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있었고, 그 좌우로 일제 제9 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주중공사(駐中公使) 시게미쓰(重光葵)·거류민 단장 카와바다(河端貞次), 주중(駐中)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민단 간부 도모노(友野盛) 등 상해 사변의 원흉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뒷편의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 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40분경,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자 그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매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2m 가량 전진하여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그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에게 명중하면서 폭발하였다.
일본 육군대장 시라가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 처의 파편을 맞아 앓다가 5월 24일 사망하였고, 제9사단장 육군 총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가 절단되었으며, 해군 총사령관인 제3 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시력을 잃었다. 또한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다리가 부러졌고, 거류민 단장이며 상해 사변의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외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 간부인 도모노(友野盛)가 각기 중상을 입었다.
그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체포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동년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며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