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禹德淳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단지동맹|안중근의거|흑룡강성 한인민단 위원장|대한 국민당최고 위원 |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9월 26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충청북도 제천(堤川) |
| 거주|이주지 |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
| 활동지 | 하얼빈 |
| 활동지 | 흑룡강성 |
| 활동지 | 서울 |
| 묘소 | 서울 동작구 애국지사 묘역 59 |
일제 강점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계획에 참여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우덕순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러시아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 곳에서 청년 교육에 힘쓸 뿐만 아니라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과 함께 의병 양성에 전력을 기울여 항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여름 의병대의 참모총장 안중근과 함께 함경북도 경흥(慶興)·회령(會寧)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큰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9년에는 노우키에프스크[연추(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단지 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동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과 함께 이등박문(伊藤博文) 처단을 거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뒤 안중근과 공범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안중근과 함께 여순(旅順)에서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하얼빈·치치하르·만주리(滿州里) 등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였다. 해방 후에는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서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수송에 전력을 기울였다. 귀국한 후 1948년에는 대한 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 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며 건국 사업에 힘썼다.
1876년 충청북도 제천(堤川)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丹陽), 호는 단운(檀雲)이며, 이명(異名)은 연준이다. 아들은 우대영(禹大榮)이다.
서울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면서 독립 협회 등 애국 계몽 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국내에서는 활동할 여지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국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겨울에 러시아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동지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는 등 청년 교육에 힘썼다. 또한 1907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과 함께 의병 양성에 힘쓰며 항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여름 의병대의 참모총장 안중근과 함께 함경북도 경흥(慶興)·회령(會寧)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큰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전하다 체포된 뒤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감옥에서 복역 중 탈출하였다. 1909년 봄 노우키에프스크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결사보국을 맹세하였다. 한편 그는 이름을 연준으로 고치고 담배행상을 하며 노령 각지를 왕래 하면서 동지들 간의 연락을 취하던 중 그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이등박문(伊藤博文) 처단 계획을 듣고 함께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도중에 유동하(劉東夏)·조도선(曹道先)도 함께 하얼빈으로 가서 이등박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안중근이 거사를 목적에 두고 강개한 마음으로 장부가(丈夫歌)를 읊자, 우덕순도 다음과 같은 거사가(擧事歌)를 지어 기필코 이등박문을 처단하여 조국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였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저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何相見之) 만야(晩也)런고, 너를 한 번 만나려고 수륙(水陸)으로 기만리(幾萬里)를 혹은 윤선(輪船) 혹은 화차(火車) 천신만고 거듭하여 노청양지(露淸兩地) 지날때에 앉을때나 섰을때나 앙천(仰天)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東半島)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오호간악(嗚呼奸惡) 이 노적(老賊)아 아등민족(我等民族) 2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 없이 뺏노라고 궁흉참악(窮兇慘惡) 저 수단을 지금 네 명(命)이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갑오독립 시켜놓고 을사체약(乙巳締約)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北向) 할 줄 나도 역시 몰랐노라. 덕(德)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너뿐인줄 알지 마라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보는 대로 내손으로 죽이리라.”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등박문을 처단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차이자거우(蔡家溝) 역에서 대기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역[哈爾濱] 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거사하기로 하였다. 당시 이등박문이 탄 기차는 차이자거우 역을 그냥 지나쳐 하얼빈 역에서 정차하였다. 이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뒤 공범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안중근과 함께 뤼순[旅順]에서 재판을 받고 이듬해 징역 3년 형을 언도받았으며,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이때, 함흥 감옥에서 탈출했었던 사실이 드러나 2년의 형량이 추가되어 1915년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다시 하얼빈·치치하르·만주리(滿州里) 등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해방 후에는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수송에 전력을 기울였다. 귀국한 후 1948년에는 대한 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 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면서 건국 사업에 힘썼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있다가 1950년 9월 26일 6·25전쟁 중 인민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1968년 9월 국립 서울 현충원애국 지사 묘역(묘비번호 59)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