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奉昌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금정청년회 간사|한인 애국단|일왕 히로히토 암살 시도 |
| 출생 시기/일시 | 1900년 8월 10일 |
| 수학 시기/일시 | 미상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1월 8일 |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10월 10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 출생 |
| 거주|이주지 | 일본오사카 |
| 학교|수학지 | 경성 용산 |
| 활동지 | 경성 용산 |
| 활동지 | 중국상해 |
| 활동지 | 동경 앵전문 |
| 묘소 |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묘역 |
상해 임시정부한인 애국단의 단원이자 1932년 1월 8일 일본동경에서 일왕(日王)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
이봉창은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효령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봉창은 천도교가 세운 서울 용산의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학을 공부를 하였다. 1913년에는 일본인 제과점의 점원으로 일하였으나, 주인으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1918년에는 남만(南滿) 철도회사용산 정거장에서 운전 견습을 했으나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여러 수모를 당하였다. 1921년경 한·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를 겪으면서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4월에는 직책에서 해고당하였다.
이봉창은 1924년 9월 자신의 집에서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를 역임하며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 형 범태(範泰)와 같이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이봉창은 그 곳에서 일본어를 익히면서 상점 점원이나 철공소 직공·잡역부·날품팔이 등을 하였다. 그곳에서 이봉창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로 바꾸었다. 이후 도쿄[東京]·오사카 등지를 전전하며 가스회사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26년에는 병고(兵庫)에서 1년간 일본인 표구사의 보조원으로 일하였다.
이봉창은 6년여 간 일본어를 배우고 직접 일본 생활을 체험하다가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해, 임시정부 청사와 상해대한인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봉창은 독립운동에 직접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1931년 중국상해[上海]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다. 이봉창은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동녕의 승인 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에 전력을 기울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이봉창은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였다. 또한 김현(金鉉)으로부터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恭根)의 집에서 선서식을 하였다. 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이봉창은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동경으로 건너갔다. 이봉창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거사를 치르기 위해 상해에 있는 김구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동경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향해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하였다. 이봉창은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은 각 신문을 통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봉창은 10월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