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한자 李始榮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정치가
성별
대표경력 궁내부 수석참의|한성재판소장|경학사|신흥학교 설립|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출생 시기/일시 1869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이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35년
활동 시기/일시 1940년~1945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47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48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52년 8월
몰년 시기/일시 1953년
추모 시기/일시 1949년
거주|이주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활동지 한성
활동지 한성
활동지 평양
활동지 유하현삼원보
활동지 상해
활동지 남경
활동지 중경
활동지 서울
활동지 서울
묘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정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만주와 국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치가.

개설

이시영은 구한말의 관료이면서 동시에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었으며, 경학사(耕學社)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해방될 때까지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부통령이 되었으며, 민주국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가계

이시영(李始榮)은 경주 이씨로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옹(聖翁)이요, 호는 성재(省齋) 혹은 시림산인(始林山人)이었다. 이시영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서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이다. 부친은 우찬성, 이조판서를 지낸 유승(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이조판서 순조(順朝)의 딸로서 당대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 회영(會榮), 시영, 소영(韶榮), 호영(頀榮) 등 7형제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난 선생은 첫 부인으로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을 맞았으나 사별하고, 반남 박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활동 사항

이시영은 1885년(고종 22)에 진사가 되고 동몽교관에 임명된 뒤 1887년에 형조좌랑를 역임하였으며, 189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로는 홍문관교리, 승정원부승지, 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895년 관직에서 물러나 10년 동안 자신을 가꾸었다. 중형 회영(會榮)을 비롯하여 이상설(李相卨)과 같은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근대학문의 탐구에 몰두한 것이다.

1905년 이시영은 관직에 다시 나아가 외부(外部) 교섭국장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외부대신 박제순이 을사조약에 서명하자 이시영은 교섭국장직을 사직하고, 박제순 집안과 절교를 선언하였다.

이시영은 1906년에 평안남도 관찰사가 되었다. 현지에 부임한 선생은 근대학교 설립 및 구국계몽운동 확산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907년에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이 되어 상경하고, 1908년에는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 고등법원판사 등 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07년 형인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등이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을 때, 선생은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참가하였다. 신민회 지도자들은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바로 인식하면서, 계몽운동에 의병항쟁의 방략을 도입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신민회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을 준비하였다.

이시영은 형제들과 더불어 가재(家財)를 처분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1910년 말 서간도(西間島)로 출발하였다. 이시영 일행이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였다. 일행이 도착한 직후인 1911년 4월에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경학사의 기능은 부민단한족회로 계승, 발전되어 갔고,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전개되면서 이시영 형제들도 모두 여기에 참가하면서 국내에서 마련해 간 재원을 쏟아 부었다. 이시영은 1913년 9월에 북경으로 가서 원세개를 만나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하고자 하였으나 원세개가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1919년 2월 1일자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이시영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등과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시영은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9월 15일부터는 재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자금 관리를 도맡았다. 그러나 192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임시정부는 서서히 활력을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지키는데 진력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참가하였다.

이후 이시영은 1930년 1월 25일에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 독립당에 참여하였으며, 1933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법무장)이 되었다. 1935년에는 다시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선 민족 혁명당이 결성되면서 임시정부가 다시 어려움에 처하자 임시정부 지원 정당으로서 남경에서 결성된 한국국민당에 김구와 함께 참여하였다. 이어서 그 해 11월에는 새로운 내각이 결성될 때, 이시영은 법무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임시정부가 진강에서 장사, 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중경에 도착할 때까지 선생은 임시정부의 법무장으로서, 그리고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 출신 의원으로서 활약하면서 정부를 전시체제로 바꾸어 나가는 데 힘을 쏟았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도착한 뒤 그는 임시정부(政)와 한국 독립당(黨)을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이시영은 1940년 이후 1945년까지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의정원 의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이시영의 활동은 김구와 노선을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시영은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외교문화활동에도 참가하였다. 1942년 중경에서 조직된 한중문화협회에 김구, 김규식, 조완구, 조소앙, 박찬익, 최동오 등과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이시영은 1945년 11월 23일에 임시정부 요인 제1진의 한 사람으로 환국하였다. 귀국 후 이시영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 성균관 총재로 활동하였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도 진력하여 대종교의 사교(司敎), 원로원장, 도형(道兄) 등의 주요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 무관 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으니,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 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 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47년 9월 이시영은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 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부산이 전시수도이던 시절인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 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와 결별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2년 8월 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시영이 1953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9일간의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처음에 서울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에 수유리에 있는 묘소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局, 1934)
  •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애국동지원호회, 1956)
  • 국사편찬위원회, 『기려수필(騎驢隨筆)』(탐구당, 1971)
  • 국사편찬위원회, 『심산유고(心山遺稿)』(탐구당, 1973)
  • 『독립운동사』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정원문서(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국회도서관, 1974)
  • 『독립운동사자료집』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2-중국편(中國篇)-』(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6)
  • 김후경,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광복출판사, 1983)
  • 박창화, 『성재이시영소전(省齋李始榮小傳)』(을유문화사, 1984)
  • 『독립유공자공훈록(獨立有功者功勳錄)』 5 (국가보훈처, 1988)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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