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한자 李相龍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성리학자|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협동학교건립|대한협회 안동지부|경학사사장|군정부 총재|정의부 독판|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국무령
출생 시기/일시 1858년
활동 시기/일시 1896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몰년 시기/일시 1952년 5월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
거주|이주지 길림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활동지 가야산 일대
활동지 안동
활동지 안동
활동지 유하현 삼원보
활동지 유하현
활동지 환인현
활동지 상해
묘소 대전
정의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간도 지역에서 신흥 강습소, 부민단 등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상용은 1905년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仁植)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여, 강연회 등을 통하여 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간도(間島)로 망명, 길림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어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여 동료들의 자치활동에 힘쓰는 한편,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였다.

가계

이상용의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이다. 이승목(李承穆)의 아들이다.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한 이후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활동 사항

이상룡은 185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평소 정치제도와 천문·지리·수학 등 실용적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병학(兵學)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몰두하였다.

1896년 이상용은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마련하고 의병항쟁을 시도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에는 의병운동에 전력을 기울여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무기와 병력이 훨씬 월등한 일제에 대항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이상용은 의병과 관련되었다 하여 안동경찰서에 잠시 구속되었으나 그를 지지하는 민중의 시위로 석방되었다. 3월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때 민중의 단결과 의식의 환기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1910년 국권이 상실되면서 강제로 해산 당하였다.

이상룡은 1910년 11월 신민회(新民會)에서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 한다는 계획을 듣고, 해외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2월 서간도로 가서 『한만관계사』를 저술하였다. 당시 망명한 민족 운동가들이 독립군 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삼원보 고산자(孤山子)에서 3백여명이 군중대회를 열고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하였다. 이 때 5개의 방침을 결의하였는데, 결의 사항으로는 (1) 민단적 자치기관의 조직, (2) 도의적 질서의 확립, (3) 개농주의(皆農主義), (4) 학교설립, (5) 군관의 훈련과 인재의 양성 등이었다. 동년 4월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자치체로서 경학사(耕學社)가 조직되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김대락 등에 의해 경학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동녕(李東寧)은 재무부장, 이회영(李會榮)은 내무부장, 유인식이 교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상용은 독립을 위해서는 산업·교육운동을 주축으로 군사운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인의 정착, 경제력 향상, 항일운동의 전개 등을 목표로 활동을 하였지만, 천재지변이 겹친데다가 풍토병 등의 난관으로 운영난에 부딪쳐 끝내 해산되고 말았다. 그 사이 이상용은 재만 한인들의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중국 측과 꾸준히 교섭하여 한인들에 대한 귀화의 권리를 승인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만주의 한인들이 지켜야 할 중국인과의 관계나 항일의 자세 등에 대하여 호소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한인의 각성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3·1 운동 후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이상룡은 군정부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5월에는 신흥 강습소(新興講習所)신흥 무관 학교로 개칭해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상용은 해외 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11월 군정부를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남북만주 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1년 1월 서로 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하고 관전현(寬甸縣) 삼도항(三道港)에서 남만 통일회(南滿統一會)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서간도 일대의 항일 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해 대한 통군부를 결성하였다.

동년 4월 북경을 중심으로 상해와 만주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지휘권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여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24년 10월에는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督辦)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제2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제인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채택하자,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되었다. 이상용은 이후 6개월 동안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인해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이후 서간도 반석현(磐石縣) 호란하(呼蘭河)로 돌아와,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국민부로의 부분적인 통합을 이룬 채 1932년 5월 병환으로 길림성 란(舒蘭) 소성자(小城子)에서 사망하였다.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다.

저술 및 작품

독립투사 이상용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가 저술한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작품이 있다.

묘소

이상용의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만인 1990년 9월 유족과 국가보훈처 관계자들로 구성된 유해 봉환반에 의해 중국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현재는 국립 서울 현충원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獨立有功者功勳錄』5 (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1988)
  •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 (국가보훈처, 1992)
  • 채영국,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의 독립정신』(역사공간, 2007)
  • 주동욱,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삼인, 2013)
  •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임시 정부자료집』
  • 최덕수, 「洲李相龍硏究」 (『史叢』19, 1975)
  • 박영석,「日帝下在滿韓人社會의 形成」 (『한국사학』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 박영석, 「석주이상룡연구(石洲李相龍硏究)」(『歷史學報』89,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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