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李甲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제국 육군장교|신민회 창건|『정교보』 발행 |
| 출생 시기/일시 | 1877년 6월 22일 |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몰년 시기/일시 | 1917년 3월 2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평안남도 숙천군(肅川郡) 서해면(西海面) 사산리(蛇山里) |
| 거주|이주지 | 노령 |
| 학교|수학지 | 일본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연해주 |
| 묘소 | 러시아니콜리스크 |
구한말·일제 강점기 국내와 노령 일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갑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해체된 이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대한 제국 육군장교가 되었다. 이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인직을 사임하고 국내와 노령 일대에서 애국 계몽 운동에 종사하였다.
이갑은 평안남도 숙천군(肅川郡) 서해면(西海面) 사산리(蛇山里)에서 태어났으며 이응호(李膺灝)의 4남 2녀 중 3남이다.
이갑의 호는 추정(秋汀)으로 본명은 휘선(彙璿)으로 1888년(고종 25) 무자 식년시에 식년진사 3등으로 급제하였다. 1896년 독립 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1898년 11월의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 때에는 간부급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연말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에는 한 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사비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조(成城) 학교에서 입학하여 1901년 12월 4일에 졸업한 후 1902년 4월 13일 일본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후보생으로 군무를 익히고 같은 해 12월 1일에 일본육군사관학교 15기생으로 입학하고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육사 동기인 유동열 등과 함께 러일전쟁에 종군한 이후 국내로 돌아와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학도대로 보임되었고 육군 유년학교 학도대로 이속되어 초등 군인교육을 담당하였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 등이 중심이 되어 개혁당(改革黨) 운동을 추진할 때에는 이에 가담하였고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해서 국권을 박탈하자, 무관직을 사임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06년 10월에 박은식(朴殷植)·정운복(鄭雲復)·김명준(金明濬)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창립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했으며,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하여 서북 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는 데에도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서북 협성학교(西北 協成學校, 후일 五星學校)를 설립하여 교육 구국 운동에도 종사하였다.
1907년 4월 이갑은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煇)·이동녕(李東寧)·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창립위원이 되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창건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等博文) 저격사건 때 안중근과의 관계를 추궁당하며 용산 헌병대에 구속되어 3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기지를 창설할 목적으로 간부의 일부를 망명시킬 때 여기에 선발되어 1910년 4월 안창호·유동열·신채호(申采浩)·김희선(金羲善)·이종호(李鍾浩) 등 동지들과 함께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밀산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교군과 군사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노령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정교보(正敎報)』를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과 계몽사업을 하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만주 길림성 목릉현(穆陵縣)에서 서거하였다.
고인의 묘소는 러시아니콜리스크백인 공동 묘지에 있다.
이갑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