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

한자 姜鐵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천영학교 교사|북로군정서 총재비서|군자금조달활동
출생 시기/일시 1894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1928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42년
몰년 시기/일시 1943년
추모 시기/일시 1963년
출생지 충청남도 부여
거주|이주지 길림성 연길현
활동지 길림성 연길현
활동지 길림성 왕청현
활동지 회령 경성 부여
정의

일제 강점기에 북로 군정서 총재 비서를 역임한 인물.

개설

강철구는 1920년 1월 북로 군정서에 가입하여 서일 총재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임시 정부를 위해 군자금을 조달하고 동지를 확보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동불사 상양리(上陽里)에서 천영 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에 힘썼다.

가계

강철구는 1894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해산(海山)이다.

활동 사항

강철구는 1917년 대종교 신도로서 만주에 건너가 연길현동불사(銅佛寺)천영 학교(天英學校) 교사가 되어 2세의 민족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런 가운데 강철구는 1920년 1월 북로 군정서에 가입하여 총재 비서로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재무국장 윤정현(尹庭鉉)의 명령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부여 갑부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 등에게서 군자금을 조달한 후 돌아와서 서무 부장 김택(金澤)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강철구는 1922년 6월 사관 연성소 확충 자금 모집을 위해 임시정부 발행 공채 35,000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이에 함북 회령에서 김동진(金東鎭), 청진에서 김동순(金東純), 서울에서 문용섭(文龍燮)을 각기 동지로 영입하였다. 같은 해 9월 부여에서는 문장섭(文章燮)·김재설·김삼현·문경섭 등의 동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군자금 모집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강철구는 강경(江景)에서 김찬형(金燦亨)·김철수(金哲洙) 등을 영입하여 이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상경하여 동생 강용구(姜鎔求) 집에 은신 활동하면서, 김정제(金廷濟)·조창호(趙昌鎬)·김목현(金穆鉉) 등을 영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뒤 다시 고향 부여로 내려가서 군내 각 면을 순방하고 군자금의 필요성과 임시 정부 요인들의 애국 활동을 자세히 설명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곳에서 박창규·박남규와 이기범(李基範)으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 공채를 각 면에 다니면서 소화시키도록 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모금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활동을 마치고 만주로 가려고 준비하는 중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31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철구는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동불사 상양리(上陽里)에서 천영 학교 교사로 다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에 힘썼다. 1942년 강철구만주동경성(東京城)에 대종교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만주 독립운동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동년 11월 19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43년 목단강성(牧丹江省)가목사(佳木斯)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8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 1976)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 정부사』(집문당, 1982)
  • 이현희, 『3·1 독립운동과 임시 정부의 법통성』(동방 도서, 1987)
  • 『조선 일보』 (19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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