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弼淳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의사, 독립운동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최초 면허 의사|세브란스병원 외과 의사|신민회|독립군 기지 건설운동 |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
| 수학 시기/일시 | 미상 |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89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9월 1일 |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 출생지 | 황해도 장연 |
| 거주|이주지 | 한성 |
| 거주|이주지 | 만주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학교|수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한성 |
| 활동지 | 서간도, 내몽고치치하얼 |
만주에서 독립운동가의 주치의 및 한국 독립군의 군의관으로 활동한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김필순은 제중원에 재학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에 다니면서 구국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07년에는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김필순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울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김필순은 언더우드 집에 머물면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4년간의 학업을 마쳤다. 1899년 제중원에서 셔록스의 통역 및 조수로 일하였다. 1900년에는 에비슨의 통역 및 조수로 일하였다. 김필순은 1906년 외과총론, 화학, 해부생리학, 내과학 등의 책을 번역하였다. 이미 졸업 전부터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김필순은 당시 병실 및 외래에서 보조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원 경영에 관해서도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김필순은 재학 중에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에 다니면서 구국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07년에는 도산안창호(安昌浩)와 결의형제를 맺고 신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는 세브란스의학교(제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여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정규 전임교수는 에비슨, 허스트, 김필순, 홍석후, 박서양이었다. 1910년 김필순은 의학교의 책임을 지는 학감으로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간호원 양성소와 보구여관(保救女館)의 감리회 간호원 양성학교에서도 강의하였다. 졸업 직후에는 병동과 외과의 부의사로 임명되었고 1911년에는 병원의 외래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김필순은 세브란스 병원에 재직하면서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논의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망명하였다.
김필순은 이동녕(李東寧)·전병현(全秉鉉)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힘썼다. 또한 내몽고치치하얼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김필순은 이곳에 병원을 열어, 부상당한 독립군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김필순은 당시 대부분의 수입을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료업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력하던 중, 1919년 9월 1일 일본인 조수가 주는 우유를 마시고 사망하였다.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