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

한자 尹熙順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안사람 의병가 작사|항일의병|노학당|조선독립부대
출생 시기/일시 1860년 6월 25일
활동 시기/일시 1895년~1910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활동 시기/일시 1915년
몰년 시기/일시 1935년 8월 1일
추모 시기/일시 1983년
추모 시기/일시 1990년
출생지 경기도 구리
거주|이주지 요령성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 고려구
활동지 강원도 춘천
활동지 강원도 춘천
활동지 요령성 신빈현 평정상 난천자 고려구
활동지 환인현 팔리전자진 취리두
활동지 무순현 포가둔
활동지 요령성 동고촌
정의

일제 강점기 전후에 국내와 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여성 독립운동가.

개설

여성 의병으로서 시아버지인 유홍석의 활동에 공감하여 1895년부터 의병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1907년 군대 해산과 광무황제[고종(高宗)]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의병 활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가사를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경기도 구리에서 아버지는 익상(翼商)과 어머니 평해 황씨(平海黃氏)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춘천 의병장 외당(畏堂)유홍석(柳弘錫)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義菴)유인석(柳麟錫)의 조카인 유제원(柳濟遠)과 결혼하였고,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으로 의병 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활동 사항

윤희순은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윤희순의 집안은 인조반정 공신인 윤희평의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을 공부하였다. 윤희순은 16세가 되던 해 유제원(柳濟遠)과 결혼하였다. 유제원은 춘천 의병장 외당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 창의대장 의암유인석의 조카이고 화서학파 제2대 종주인 성제유중교의 종손이다. 따라서 유제원과의 결혼은 유학자 집안끼리의 결혼이었고, 그녀가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위정척사 계열의 유생들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윤희순의 시아버지인 유홍석도 춘천의 유림들과 함께 이소응(李昭應)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의병운동에 나섰다.

유홍석이 의병활동으로 10달간 집을 비운 사이 윤희순은 매일 아침 시아버지의 무사 귀가와 의병의 전승을 기원하며 기도하였고, 의병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밥을 달라고 요구하면 기꺼이 밥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요구하였고,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촉구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과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유홍석은 춘천에서 류중악, 류영석, 류제곤 등과 함께 의병 600명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윤희순은 춘천 의병에 참여했던 의병장의 부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들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금하였다. 이를 통해 가정리 여의내 골에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하여 탄환, 유황 등을 모아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는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였다. 또한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하였다. 여성의병은 의병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 하는 등 의병훈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또한 의병 훈련에도 직접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 노래’ 등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제작하며 구국활동을 촉구하였다. 이는 의병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민족이 자각하기를 원했던 열망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의병을 진압하는 관군과 밀고자는 ‘좀벌레’로 취급하였다.

윤희순은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아들 돈상, 민상, 교상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1935년까지 25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만주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유홍석의 제종제인 의병장 유인석은 1911년 유씨네 처갓집, 친척, 부하, 문인, 제자, 친구들 모두 40~50가구를 중국요령성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 고려구로 이사시켰는데, 선생 역시 의병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며느리인 윤희순에게 맡기고 의병 활동에 나섰다. 남자들이 의병활동에 나서자 가족의 생계는 윤희순을 비롯한 여성들의 몫이 되었다. 이에 윤희순은 식량을 구걸하면서도 의병의 가족들을 뒷바라지하면서도 항일 선전 활동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2년 초에는 환인현 팔리전자진 취리두 남산으로 이주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항일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이회영, 우병렬, 우병렬의 부인 채인산, 중국인 도원훈과 손홍령의 도움으로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대종교가 설립한 동창 학교의 분교인 노학당을 창립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15년까지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등을 비롯한 50여 명의 항일 운동가가 양성되었다. 그러나 1915년 일제의 간섭으로 노학당은 폐교되어 버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이 사망하였다. 이에 윤희순은 1915년 막내 아들 교상을 데리고 환인현을 떠나 무순현 포가둔으로 이주하여 조선 독립단과 조선 독립단 가족부대를 조직하고, 조선 독립단 학교를 설립하였다.

1930년대 초 윤희순은 요령성 동고촌 뒷산 밑으로 이주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윤희순은 해성현 묘관둔으로 이사하여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아들 유돈상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처남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어머니인 윤희순의 품 안에서 순국하였다. 그리고 윤희순도 유돈상이 숨진 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윤희순은 「병정노래」, 「의병군가」, 「병정가」, 「안사람 의병가 노래」,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왜놈 앞잡이들아」, 「안사람 의병노래」, 「애달픈 노래」, 「금수들아 받아보거라」, 「왜놈 대장 보거라」, 「숙모전 상서」, 「신세타령」, 「성제선생댁」, 「해주윤씨일생록」 등의 노래를 지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대통령 표창(1983년)과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박한설 편, 『외당선생삼세록(畏堂先生三世錄)』(강원일보사, 1983)
  • 『강원 의병사』(강원의병운동사연구회, 1987)
  • 『대한민국 독립유공 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원영환, 『윤희순의 항일독립투쟁사』(춘천시, 2005)
  • 심옥주, 『윤희순연구 : 의병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을 중심으로』(정언, 2011)
  • 고순희, 「윤희순의 의병가와 가사」(『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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