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元鳳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독립운동가, 정치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의열단 단장|중국국민혁명군 소위|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한국 광복군 부사령관|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좌우합작운동 |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0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3년~1916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6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8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 수학 시기/일시 | 1925년~192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193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말 |
| 활동 시기/일시 | 1942~194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2월~194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 몰년 시기/일시 | 1958년 |
| 출생지 | 경상남도 밀양 |
| 학교|수학지 | 경상남도 밀양 |
| 학교|수학지 | 경상남도 밀양 |
| 학교|수학지 | 경성 |
| 학교|수학지 | 중국 천진 |
| 학교|수학지 | 중국 남경 |
| 학교|수학지 | 유하현 삼원보 |
| 학교|수학지 | 중국 광저우 |
| 활동지 | 중국 길림, 일본, 국내, 상해 등 |
| 활동지 | 광저우 |
| 활동지 | 난창(남창) |
| 활동지 | 북경 |
| 활동지 | 상해 |
| 활동지 | 무한 |
| 활동지 | 중경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평양 |
일제 강점기 밀양 출신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아버지는 김주익(金周益), 어머니는 이경념(李京念)이다. 김원봉의 호는 약산(若山)이다. 이명으로는 최림(崔林), 이충(李冲), 진국빈(陳國斌), 천세덕(千世德), 김세량(金世樑), 왕세덕(王世德), 암일(岩一), 왕석(王石), 운봉(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沖), 김약삼(金若三) 등을 썼다. 고모부 황상규의 문인이다.
김원봉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의열단, 조선의용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활동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김구와 함께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 북한에 잔류하여 활동했다.
김원봉은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8년 밀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에 인근 동화 중학(同和中學) 2년에 편입하였다. 김원봉은 교장 전홍표(全鴻杓)의 영향을 받아 항일사상을 갖게 되었다. 전홍표 교장의 배일사상으로 중학교가 폐교 당하자 학우들과 함께 성금을 모금하여 폐교를 면하게 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동화중학이 폐교되자 표충사에 가서 손자병법, 한비자, 오자 등의 병서를 공부했다.
그런 가운데 김원봉은 1911년 11월 메이지(明治) 천황의 생일에 한봉인, 윤세주, 강인수 등과 함께 일장기를 변소에 넣은 사건으로 심한 구타를 당하였으며, 혐의를 부인하다가 결국 퇴교 당하고 말았다.
김원봉은 1913년 서울중앙학교에 다녔다. 중앙학교 재학 중 김약수, 이여성 등과 교류했으며, 이들과 평생 친구가 되었다. 김원봉은 1916년 봄 중앙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6년 10월 독일계가 운영하는 톈진(天津)덕화학당에서 독일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이듬해 방학으로 귀국하였으나 다시 중국으로 가서 펑톈(奉天)에서 고모부 황상규를 만났다. 1918년 난징(南京)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 공부했다. 1년 동안 다니다가 중퇴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려는 상해 지사들의 정책에 반발, 간도로 가서 군대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김원봉은 1919년 2월 신흥 무관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6개월 동안 폭탄 제조법, 체력 단련, 군사학 등에 대해 교육 받았다. 신흥 무관 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졸업을 3개월 남겨둔 상태에서 학교를 떠났다.
그 직후 김원봉은 1919년 11월 의열단(義烈團)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의열단은 무장 투쟁노선을 내세우고 암살투쟁을 전개했다. 칠가살(七可殺)에 해당되는 자들은 조선총독, 조선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의열단은 본거지를 만주, 상해, 난징 등지로 옮기면서 요임 암살과 경찰서 습격 등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1920년 초 김원봉은 단원들을 국내에 투입시키기 위해 총기와 폭탄의 반입을 계획했다. 그리고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조선 총독부 투탄 사건, 사이토마코토 총독 저격 미수 사건, 도쿄이중교 투탄 사건 등을 지도했다.
이러한 개인 테러 활동의 한계를 절감한 김원봉은 군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 준비작업으로 1925년 황포 군관 학교(黃埔軍官學校) 훈련생으로 입소하였다. 1926년 10월 졸업과 동시에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되어 황포군관학교 군관단에 배속되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재학 중 황포군관학교, 중산대학 등의 졸업생들을 의열단에 포섭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 가운데 1927년 중국국민당의 북벌(北伐)에 합류했다. 같은 해 8월 중국 공산당의 출범을 이끌어 낸 난창봉기에 참여했다.
김원봉은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했다. 1930년경에는 베이징에서 ML파 조선 공산당의 안효구(安孝駒)와 제휴하여 조선 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했다.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개설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간했다. 나아가 김원봉은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 혁명 간부 학교를 창설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3년 대일 전선 통일 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 혁명세력의 결집을 도모했다. 1935년 한국 민족 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을 신한 독립당, 한국 독립당, 대한 독립당, 조선 혁명당, 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조직했다. 1937년 한국 민족 혁명당은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개칭했다. 조선 민족 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에서 전위동맹, 혁명자 연맹, 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했고, 대일 선전전(對日宣傳戰)에 주력했다. 그리고 그 군사적 기반으로 조선 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이 되었다.
김원봉은 1939년 5월 김구(金九) 등의 혁명단체와 공동 정강 아래 단일 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내용의「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발표했다. 그는 독립운동은 계급에 기반을 둔 공산 주의 운동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생각을 달리한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이 이탈하여 김두봉(金枓奉)의 독립 동맹으로 옮겨갔다.
김원봉은 1942년 중경 임시 정부에 합류하여 임시 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1944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 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그리고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귀국 시 군무 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 인민 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이름이 올랐다. 귀국 이후 계속된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신탁 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 국민 회의에서 탈퇴한 김원봉은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고, 임시 약법 기초 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했다.
김원봉은 1946년 6월 조선 민족 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 구축에 노력했다. 김원봉은 1948년 남북 제정당 사회 단체 연석 회의에 참가했고, 이후 북한에 남아 조선 노동당 중앙 위원회 중앙 위원,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 및 상임 위원회 부위원장, 국가 검열상, 내각 노동상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김일성 중심의 지배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1958년 11월 연안파와 더불어 숙청당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훈장(195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