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崔元澤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성격 |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가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구청년회회장|조선 공산당 만주총국 결성|남조선 인민 대표자 대회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6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11월 |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 몰년 시기/일시 | 1973년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7년 10월 |
| 출생지 | 경상북도 대구(大邱) |
| 거주|이주지 | 일본 동경, 중국상해 |
| 활동지 | 대구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경성 |
| 활동지 | 동경 |
| 활동지 | 간도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서울 |
| 활동지 | 평양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이자 정치가.
최원택은 일제 강점기 조선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하였다. 해방 이후 남조선 인민 대표자 대회에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1895년 경상북도 대구(大邱)에서 출생하였다.
최원택의 이명으로는 김성덕(金聲德)·서상필(徐相弼)·석초(石樵) 등을 사용하였고 창씨 개명(創氏改名)이후 임원태랑(林源太郞)이라고도 불렸다. 조선 공산당 재조직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한 최춘택(崔春澤)의 형이다.
1923년 6월 조선 공산당 중앙총국 꼬르뷰로(高麗局) 대구지역 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상미회(尙微會)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2월에는 김찬(金燦)·박일병(朴一秉)·이호(李浩)·최현(崔鉉)·윤덕병(尹德炳)·백광흠(白光欽)이 조직한 신흥 청년 동맹에 참가하였으며 3월에는 대구 청년회 회장으로 조선 청년 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결성과 남선 노농 동맹(南鮮勞農同盟)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1924년 4월 조선 노농 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될 때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8월 사상단체 정오회(正午會)에 참여하였으며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고, 같은 달 조선청년총동맹 중앙본부가 주도한 경북 청년대회에 반대하여 안동에서 대구 청년회 중심의 경북 청년대회 준비회를 발족시켰다. 3월에는 조선 노농 총동맹 조사부 담당 상무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25년 4월 조선 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전조선 민중 운동자 대회 과정에서 주도한 ‘적기(赤旗) 시위 사건’으로 일제가 검거를 시작하자 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1925년 11월 동경(東京)에 있던 조선 공산당 일본연락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초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다시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가, 당 전권위원인 조봉암(曺奉岩)·김동명(金東明)과 함께 5월에 만주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김철훈, 윤자영, 김하구와 함께 길림성 주하현 일면파(一面坡)에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결성을 결성했다. 만주총국이 개편될 때는 당 조직부에서 활동하였다. 동년 10월에는 용정에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동만구역국 이름으로 발행한 신문 『화염』의 주필을 맡았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 공산당 검거 사건’ 때 안기성(安基成)·현칠종(玄七宗)등과 함께 간도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1928년 1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7월 대전 형무소로 이감 도중 대전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죄목으로 징역 6개월을 추가로 받았다.
1936년 출옥한 뒤에는 세탁소를 경영하는 한편, 1944년 여운형(呂運亨)이 결성한 항일 비밀 결사 건국동맹의 군사위원회에 선출되어 노농군(勞農軍) 편성과 무장 봉기를 계획하였다가 1945년 검거되었으나 8월 광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1945년 9월 박헌영(朴憲永)이 주도한 조선 공산당 재건에 참여하였으며, 서울시 인민 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미군정이 임명한 서울시장을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검거되었다.
1946년 11월에는 남조선 신민당(南朝鮮新民黨)·조선 인민당(朝鮮人民黨)·조선 공산당의 3당이 합당되어 결성된 남조선 노동당(南朝鮮勞動黨)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이후 월북하여 1948년 민주주의 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에서 상임위원을 맡았고 8월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 대표자 대회에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이후 평양에 머물렀다.
1953년 8월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1955년 1월 평화 옹호 전국 민족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 9월 최고 인민회의 의장을 지냈다.